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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17자에 담긴 세상
이다혜 2015-11-12

<바쇼 하이쿠 선집: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 마쓰오 바쇼 지음 / 열림원 펴냄

“소나무에 대해선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선 대나무에게 배우라.” 마쓰오 바쇼의 시학이다. “대상과 그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때 그대의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위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바쇼 하이쿠 선집: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1100편 중 350편을 창작한 연대순으로 골라 실으며 해설을 덧붙였다. 1행으로 된 원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시는 운을 구분하기 위해 3행으로 쓰였다. 책 말미에는 바쇼가 40대에 떠났던 다섯 차례의 여행 지도가 실렸고, 류시화가 쓴 장문(60쪽이 넘는다)의 해설이 추가되었다. 5.7.5자로 된 정형시인 하이쿠. 총 17자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바쇼의 일상, 여행, 삶에 대한 생각과 그가 당시 겪었던 계절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이쿠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지만, <바쇼 하이쿠 선집…>은 해설을 통해 시어가 원래 쓰였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하게끔 돕는다.

“내리는 소리/ 귀도 시큼해지는/ 매실 장맛비.”

음력 5~6월에 내리는 장맛비를 ‘매우’(梅雨)라고 한다. 매실이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매실은 익어도 발효시키기 전에는 시어서 먹을 수 없다. 바쇼의 초기 작품으로, 장맛비를 매실의 신맛으로 연결지었다. 창작연대순으로 실린 시들이니만큼 바쇼의 시작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살필 수 있지만, 역시 몇번이고 계절이 돌고 도는 모습을 하이쿠 속에서 경험하는 일이 즐겁다.

“겨울날의 해/ 말 위에 얼어붙은/ 그림자 하나.”

추운 겨울의 빛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말 위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인데, ‘말 위’의 시어는 일본어로 읽으면 그 발음이 ‘바쇼’가 된다. 그러니 이 하이쿠의 ‘바쇼’가 그 자신을 뜻하는지 아니면 말 위를 뜻하는지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겨울에 대한 하이쿠는 오싹한 추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아서, “재미있게도/ 눈으로 변하겠지/ 겨울비”라든가 “자, 그럼 안녕/ 눈 구경하러 가네/ 넘어지는 곳까지” 하는 작품들도 있다.

51살에 여행을 떠난 길 위, 오사카에서 세상을 떠난 바쇼의 마지막 하이쿠는 최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여기까지 차분하게 읽고 나면, 하이쿠에서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던 수많은 시어들이 사실 길 위의 고단함으로부터, 그리고 오랜만에 어렵게 만난 이들과의 순간의 재회로부터 나왔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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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자에 담긴 세상 <바쇼 하이쿠 선집: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