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대해선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선 대나무에게 배우라.” 마쓰오 바쇼의 시학이다. “대상과 그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때 그대의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위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바쇼 하이쿠 선집: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1100편 중 350편을 창작한 연대순으로 골라 실으며 해설을 덧붙였다. 1행으로 된 원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시는 운을 구분하기 위해 3행으로 쓰였다. 책 말미에는 바쇼가 40대에 떠났던 다섯 차례의 여행 지도가 실렸고, 류시화가 쓴 장문(60쪽이 넘는다)의 해설이 추가되었다. 5.7.5자로 된 정형시인 하이쿠. 총 17자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바쇼의 일상, 여행, 삶에 대한 생각과 그가 당시 겪었던 계절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이쿠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지만, <바쇼 하이쿠 선집…>은 해설을 통해 시어가 원래 쓰였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하게끔 돕는다.
“내리는 소리/ 귀도 시큼해지는/ 매실 장맛비.”
음력 5~6월에 내리는 장맛비를 ‘매우’(梅雨)라고 한다. 매실이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매실은 익어도 발효시키기 전에는 시어서 먹을 수 없다. 바쇼의 초기 작품으로, 장맛비를 매실의 신맛으로 연결지었다. 창작연대순으로 실린 시들이니만큼 바쇼의 시작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살필 수 있지만, 역시 몇번이고 계절이 돌고 도는 모습을 하이쿠 속에서 경험하는 일이 즐겁다.
“겨울날의 해/ 말 위에 얼어붙은/ 그림자 하나.”
추운 겨울의 빛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말 위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인데, ‘말 위’의 시어는 일본어로 읽으면 그 발음이 ‘바쇼’가 된다. 그러니 이 하이쿠의 ‘바쇼’가 그 자신을 뜻하는지 아니면 말 위를 뜻하는지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겨울에 대한 하이쿠는 오싹한 추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아서, “재미있게도/ 눈으로 변하겠지/ 겨울비”라든가 “자, 그럼 안녕/ 눈 구경하러 가네/ 넘어지는 곳까지” 하는 작품들도 있다.
51살에 여행을 떠난 길 위, 오사카에서 세상을 떠난 바쇼의 마지막 하이쿠는 최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여기까지 차분하게 읽고 나면, 하이쿠에서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던 수많은 시어들이 사실 길 위의 고단함으로부터, 그리고 오랜만에 어렵게 만난 이들과의 순간의 재회로부터 나왔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