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아쓰시(오른쪽에서 네 번째) 감독과 <체리 블러섬 메모리즈>팀.
“실험하라!” 공교롭게도 올해 도쿄를 방문한 세명의 영화 마스터에게서 같은 말을 들었다. 사무라이상 수상자 오우삼 감독과 크로스컷 아시아 섹션 멘토로 초대받은 브리얀테 멘도사 감독, 그리고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초빙된 브라이언 싱어 감독에게서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세 감독이 다른 언어로 표현한 같은 의미의 한마디는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의 도전의식과 실험성에 대한 갈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영화축제, 제28회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가 10월22일 롯폰기 힐스에서 개막했다. 회차로 따지면 28회지만 1986년, 1988년, 1990년 세해를 건너뛴 것을 감안하면 영화제의 나이는 올해로 서른이다. 시이나 야스시 집행위원장이 3년째 도쿄영화제를 이끌고 있고 그를 필두로 한 가도가와 집행부의 프로그램도 여러모로 무르익은 것 같았다. 혹자는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산다’고 하였지만 가도가와 집행부의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현재까지는 지난 3년간 일본 경제가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2013년부터 문화콘텐츠 지원사업인 쿨 재팬 프로젝트도 이어오고 있다. 그 주된 사업분야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이고, 도쿄영화제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프로그램이 애니메이션 특별전이다.
‘기동전사 건담 THE ART OF GUNDAM’ 특별전
지난해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주축으로 한 ‘안노 히데아키의 세계’가 펼쳐진 데 이어 올해는 ‘기동전사 건담 THE ART OF GUN-DAM’ 특별전이 마련됐다. 특별전이 열리는 신주쿠 피카디리 극장에선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26편이 상영됐고, 상영 후엔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토크쇼가 이어졌다. 시이나 야스시 집행위원장은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영화제는 자본에 민감하다. 다행히 국가 지원이 안정적이고, 2020년 도쿄올림픽도 앞두고 있어 영화제로서는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쿨 재팬 프로젝트엔 애니메이션 등의 미디어콘텐츠 외에 의식주문화, 전통문화도 포함돼 있다. 도쿄의 이름난 레스토랑과 협력해 롯폰기 힐스 아레나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를 유상 제공하는 도쿄 퀴진, 긴자의 가부키 공연장과 연계한 가부키자 스페셜 나이트(올해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를 상연했다)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부대행사로 보인다.
하지만 도쿄영화제의 미래가 얼마나 유망할지는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제로서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상영작 프로그래밍이기 때문이다. 선배 영화인들이 일구어놓은 훌륭한 자산 덕에 올해 도쿄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 회고전과 특별전이 많았다. 데라야마 슈지 탄생 80주년 특별전 ‘데라야마 필름스’, 다카쿠라 겐 사망 1주기 추모전 ‘다카쿠라와 그의 영역’, ‘오슨 웰스: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기획전, 나카타 히데오와 구로사와 기요시, 시미즈 다카시의 작품을 모은 ‘마스터즈 오브 J-호러’ 기획전이 열렸고 재패니즈 클래식 섹션에는 이치카와 곤 탄생 100주년 특별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 4K리마스터링 버전 상영전, <가메라> 시리즈 디지털 리마스터링 상영전이 포함됐다. 다만 영화제가 시네마테크가 아닌 바에야 회고전과 특별전보다는 프리미어 작품이나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데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 싶다. 브리얀테 멘도사가 언급한 대로 “독립영화나 실험영화가 소개될 만한 창구가 수월치 않은 것이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는 아닐” 터이니 말이다.
상대적으로 경쟁부문에선 눈에 띄는 작품이 적었다. 무려 세편이 오른 일본영화만이 고루 양호했을 뿐 압도적인 화제작은 없었다. 그 세편은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10년 만의 복귀작인 <후지타>(FOUJITA),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정통 호러 <잔예>(The Inerasable), 안드로이드 배우를 기용한 후카다 고지 감독의 <사요나라>(Sayonara)다.
<후지타>는 한 인간의 성쇠와 고뇌를 오구리 고헤이 특유의 고적하고 문학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일본 육군 군의총감 집안에서 태어난 후지타 쓰구하루(오다기리 조)는 프랑스 유학 중 르네상스와 우키요에 화풍을 결합한 독창적인 스타일로 주목받는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자국 정부로부터 선전용 전쟁 기록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행한다. 천재적 예술가인 동시에 자기반성이 없는 전범이었던 후지타는 난잡한 사생활을 즐겼으며 그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전범 논란이 커지자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 흠모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따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하는데, 영화는 후지타가 망명을 결심하는 지점까지만 다룬다. 이중적이고 복잡한 삶 속에서 후지타는 자신의 삶을 깊이 고뇌하고 오구리 고헤이는 연민과 흥미를 동시에 담은 눈으로 그를 관찰한다. 오다기리 조가 후지타의 청년 시절부터 노년까지를 홀로 맡았고, 나카타니 미키가 후지타에게 정신적 안정을 주는 다섯 번째 부인 키미요를 연기했다.
경쟁부문 심사위원단. 트란 안 훙 감독, 시남생 프로듀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 벤트 하메르 감독, 수잔 비에르 감독, 오오모리 가즈키 감독(왼쪽부터).
내년엔 더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갖추길
<잔예>는 오노 후유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소설가 ‘나’(다케우치 유코)는 어느 날 오카야 맨션에 사는 건축학도 쿠보(하시모토 아이)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집 안에서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는 ‘나’가 얼마 전 발표한 신작 소설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쿠보와 만나 오카야 맨션의 비밀을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나’와 쿠보는 오카야 맨션이 세워지기 이전, 아주 오래전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게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직한 방식의 호러영화인데 긴장을 리드미컬하게 직조해내는 감독의 센스와 감독이 나카타 히데오의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했던 때의 역량이 돋보이는 영화다. 다만 지속적인 플래시백의 사용은 약간의 피로감을 부른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호흡으로 전개되는 <사요나라>는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배우 제미노이드-F를 출연시킨 영화로, 앞선 두 영화와는 전혀 다른 독창성을 지녔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디스토피아를 따뜻하고 몽환적인 색채로 예쁘고 시니컬하게 꾸며낸 독특한 작품이다. 야타베 요시 경쟁부문 프로그램 디렉터는 “균형 있는 라인업”과 “장르 혼합적인 작품”을 안배하려 했다고 한다. 적어도 <사요나라>에 한해서는 그 말에 동의할 만하다.
크로스컷 아시아 상영작 <발릭 바얀 #1 메모리즈 오브 오버디벨롭먼트 리덕스 Ⅲ> 키드랏 타히믹 감독, 카와얀 드 귀아 아트디렉터(왼쪽부터).
아시아의 미래 부문에선 젊은 여성감독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출품작 10편 중 5편이 여성감독의 연출작이다. 빼어나게 훌륭한 작품은 없었지만 ‘아시아의 미래’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의 라인업도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펑하오샹의 시나리오작가였던 룩위심과 장초치 감독의 어시스턴트였던 서니 유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녀들의 관계를 다룬다.
룩위심의 <레이지 헤이지 크레이지>(Lazy Hazy Crazy)는 원조교제로 용돈벌이를 하는 되바라진 소녀들의 시기, 질투, 애정, 관심, 반목과 연대를 솜사탕처럼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색채로 연출했다. 서니 유의 <키즈>(The Kids)는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된 소녀가 우울하고 서글픈 방식으로 자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코하마 사토코의 신작 <배우>(The Actor)는 일인극에 가까운 야스다 겐의 다채로운 연기가 시선을 붙들어두는 작품이다. 오우삼, 브리얀테 멘도사, 브라이언 싱어에 이어 이시자카 겐지 아시아영화 프로그램 디렉터도 “실험성”을 강조했지만 그들의 언급만큼 프로그램이 실험적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미 갖고 있는 유산을 최대한 활용한 안정적인 프로그램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시이나 야스시 집행위원장은 TIFFCOM(도쿄국제영상견본시, Marketplace for Film&TV in Asia)과의 연계가 긴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영화만을 위한 영화제가 아닌 더 넓은 축제의 장으로서의 영화제를 꿈꾼다”고 말했다. 영화제 아이덴티티를 다종다양한 문화콘텐츠가 다채롭게 어우러지는 장이라 명명한다면,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영화제’로서의 청사진을 화려하게 그릴 생각이라면 보다 도전적이고 패기 있는 프로그램을 기대해보고 싶다. 관계자들이 내내 주창한 “실험성”에 한번 더 손가락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