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웅렬, 이하윤, 이이언, 조남열, 송인섭(왼쪽부터).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슬펐지.”(<날개> 중에서) 2000년대 중반, 음악팬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비선형》과 《이상한 계절》 두장의 앨범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과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을 거머쥔 밴드, 못(Mot, 이하 못)이 돌아왔다. 연못의 못을 뜻하는 이름처럼 깊은 사운드, 그리고 시적인 가사가 만나 ‘못스러움’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낸 그들이다. 기타리스트 지이의 탈퇴와 함께 못은 2008년 활동을 중단했고, 보컬 이이언은 솔로로 활동해왔다. 7년간의 긴 공백을 깬 이번 귀환은 새 멤버들과 함께한다. 이이언을 중심으로, 그의 솔로앨범 세션 연주자였던 조남열(드럼), 이하윤(건반), 송인섭(베이스), 유웅렬(기타)이 정규 멤버로 가세해 5인조의 풀 밴드 체제를 갖춘 것. 지난 10월17일 5인조 체제로 처음 선보이는 신곡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를 발표하고, 내년 초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둔 밴드 못을 만났다. ‘못’의 수면부터 심연까지 들여다본 어느 오후 한나절의 대화를 전한다.
-오랜만에 팬들을 찾았다. 10월17일 그랜드민트페스티벌(GMF)에서 선보인 첫 무대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이이언_솔로 프로젝트 때부터 세션으로 같이 무대에 섰던 멤버들이지만, 못으로 공연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존 팬들 중엔 새로운 멤버들에 대한 경계심을 지닌 분들도 있었을 텐데, 많이 반겨주시더라. 새로운 못을 소개하는 자리로서는 합격점이지 않았나 싶다.
-솔로 활동으로도 기존 색깔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새 멤버를 영입해 밴드를 재결성하게 된 계기가 있나.
=이이언_솔로 활동은 내 이름을 걸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플랫폼으로, 못의 색깔과는 조금 다르다. 《비선형》과 《이상한 계절》로 형성한 못만의 스타일을 지켜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혼자 못의 정규 3집을 준비하기엔 벅차더라.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솔로 활동 때 세션으로 참여해준 멤버들에게, 못을 자기 밴드로 생각하고 기존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같이 가자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멤버들은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 이전의 음악 이력도 소개해달라.
=이하윤_영화 <소수의견> 원작자 손아람씨와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라는 힙합팀을 했었다. 이후엔 드러머 조남열과 함께 카페하우스라는 재즈팀을 했다. 이제 재즈 사이드맨이든 세션이든, 남의 음악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만두려던 시기에 형(이이언)이 선수를 치더라. 홍대 한 카페에 멤버들을 모아놓고 못의 멤버가 될 것을 제안했다. 각자의 음악도 반영할 수 있다는 말에 오케이했다. 나도 밝은 편은 아니라 못의 색깔이 잘 맞는다. (웃음)
조남열_카페하우스 활동을 했고, 클래식을 한 적도 있다. 같이 연주하는 형의 소개로 이이언 솔로의 세션으로 참여했다. 들어오기 전에는 부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첫 공연을 선보이고 활동을 하려니 팬들의 기대를 배반할까 우려가 되더라. “못이 변했어, 드럼 때문이야”라고 하면 어쩌지. (웃음) 기존 팬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새 멤버들의 매력으로 새로운 팬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송인섭_원래 송인섭 트리오라는 재즈 트리오를 했다. 못이 워낙 마니아층이 많아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역시 분명한 색깔이 있는 음악을 좋아하고, 함께하면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웅렬_나는 좀 망설였다. 원래 펑크 밴드를 오래 했는데, 밴드라는 건 경제적, 대중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많거니와 음악 외적으로도 인간관계 등 부침이 많은 일이다. 그런데 못은 이이언이라는 절대자가 있어 조율이 잘된다. (웃음) 아마 우린 밴드 중에서 가장 점잖고 조용하고 건전한 밴드일 거다. 여자 얘기도 안 하고 술도 거의 안 마신다. 한번은 이이언 형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부모님 계신 친구 집에 초대된 학생들 같았다. (웃음)
-못의 음악엔 독특한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록, 일렉트로니카, 트립합, 재즈의 경계를 넘나들고, 딥한 사운드와 시적인 가사가 만나 ‘비선형’의 ‘이상한’ 못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다. 자조적인 낭만이자 강박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이언_못은 특정 장르로 규정되지 않는 스타일이다. 《비선형》 발매 당시엔 트립합 사운드가 유행이기도 했다. 이젠 조금씩 트립합의 느낌은 빠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관습적 재생산이 아니라 장르적 요소를 달리해 믹스하며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하고자 한다. 못의 정서가 형성된 과정은 내 성격이 형성된 과정과 비슷하달까. 원래 우울한 정서를 지닌 편이다. 삶을 응시하고 있으면 진지하게 침잠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가면서는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음악을 할 때는 눈을 돌리지 않고 원래의 삶을 직시하고, 침잠하는 정서를 파고들어 안에 쌓인 것들을 배출해내고 승화시킨다. 그런 과정에서 받은 영감들을 먼저 가사로 표현한다. 가사를 써놓으면 그 안에 좋은 곡이 있다. 가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한, 가사가 음악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고 그에 맞는 음악을 만드는 거다.
-예민하고 섬세하지만 날이 서 있지 않은 보컬도 못의 특징이다. 무해하고 자조적인 웅얼거림 같달까. 노래한다기보다 마치 속삭이듯이 음악 위에 말을 얹는다.
=이이언_어릴 때부터 노래를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창법이다. 보컬 레슨을 받아도 음색이나 창법의 변화를 거치진 않았다. 사실, 가수 BMK에게 보컬 수업을 받았는데 “왜 자꾸 속삭이냐”고 하시더라. (일동 웃음) 그래도 꿋꿋이 내 스타일을 유지했다. 성량을 폭발시키는 창법이 됐다면 지금 못의 음악관과 달랐을 거다.
-흘리는 듯한 보컬과 달리 사운드는 상당히 구조적으로 짜여 있다. 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나.
=이이언_설계자가 있는 연역적 방식을 선호한다. 위에서 큰 디자인을 갖고 전체를 컨트롤하면서 작업해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다. 내가 통합적으로 조율하고 컨트롤하는 편이다.
-새 멤버들은 어떤 식으로 못의 색깔을 유지하거나 확장시키고 있나.
=이하윤_GMF 때 빅뱅의 <BAE BAE>를 커버했는데, 내가 힙합을 했었으니 벌스 중간에 힙합스러운 부분을 넣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색이 반영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 못의 색에 맞추려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를 많이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하나의 사운드로 완성시킬 수 있는 때가 올 거다.
이이언_굳이 시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색이 배어나온다. 이를테면 1, 2집에서는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걸 지양해 드럼의 ‘필인’(흥을 돋우기 위해 기교를 부리는 드럼 기술) 등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그런 게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정규 앨범 발매 전 선공개 곡으로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를 발표했다. 2014년 <문예중앙>에 기고한 글에서 이이언은 이 노래에 대해 “먹구름 너머를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이기를 희망한다.(…) 이제 함께 노래할 ‘우리’를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이언_듣고 보니, ‘우리’가 밴드의 새 멤버들인 셈 아닐까. (웃음) 새 멤버들과 함께하는 첫 곡이 이 곡이라는 것에도 의의가 있는 것 같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후원하는 남극 체험 프로그램에 정지우 감독, 천운영 작가 등과 간 적이 있다. 그때 칠레 푼타아레나스를 달리는 차 안에서 먹구름 기둥을 보고 가사를 떠올렸다. 사실 부러 밝은 곡을 쓰려고 한 건 아닌데, 외부에서 태도와 시선이 밝아졌다고들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조금 밝아졌나, 스스로 자문했다.
조남열_우리를 만나고 많이 밝아졌다. (웃음)
-앞으로 11월, 12월에 선공개 곡들을 하나씩 공개하고 내년 1월에 정규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라는데.
=이이언_11월 공개될 곡은 <트라비아>이다. 약간 장난기 있는 곡으로 ‘역시 밝아졌네’라고 할 수도 있는 곡이다. 그러나 그 다음 곡은 어둡고 무거운 곡이다. 이전 곡들보다 한술 더 떴음 더 떴지. (웃음) 이번주에 녹음하러 간다. 이전엔 세션으로 녹음도 하고 미디도 사용했지만, 이제는 전부 풀 밴드로 연주를 하니 밴드의 에너지가 강해지고 사운드도 풍성해졌다. 기존 정체성을 가져가면서 밴드의 느낌이 가장 강한 앨범이 될 거다.
-<썸>(2004), <발레교습소>(2004)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했다. 영화음악을 하고 싶진 않나.
=이이언_몇번 제의를 받았었는데 다른 활동들과 겹쳐 어쩔 수 없이 고사했다. 타이밍과 작품만 맞으면 하고 싶다. 스릴러, 호러도 못의 색과 잘 어울릴 것 같고 진지한 드라마도 잘할 수 있다. 많이들 연락 주시라. (웃음)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둔 소회 혹은 각오를 듣고 싶다.
=송인섭_기존 못의 색을 맞추려 했지만, 결과물은 조금 다른 결로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못이라는 밴드와 음악을 향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모습으로 3집이 나올지 나도 흥미롭다.
이하윤_오래 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룹 혹은 밴드를 친목으로 시작한다. 운이 좋으면 오래가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부딪치다보면 밴드가 깨지게 된다. 지금은 각자가 뮤지션으로서 성숙한 위치에서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0년, 20년이 지나 나이를 많이 먹어서도 밴드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이언_현재의 새로운 체제가 못이라는 밴드의 역사에 큰 변곡점이 되기보다는, 나중에 봤을 때 이 체제가 더 ‘못’답게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과정이길 바란다.
디지털 싱글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이상한 계절》(2007) 이후 7년 만에 5인조 밴드로 재정비해 돌아온 밴드 못의 디지털 싱글. 보컬 이이언을 중심으로 새 멤버 조남열(드럼), 이하윤(건반), 송인섭(베이스), 유웅렬(기타)이 합류하여 선보인 첫 곡으로, 기존 못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풀 밴드 사운드로 묵직한 에너지와 풍성함을 더했다.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무릎을 맞추고 손을 꼭 잡았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네.” 여전히 시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가사로, 음악팬들에게 못의 건재를 알림과 동시에 변화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11월과 12월에 각각 한곡씩 디지털 싱글을 선공개한 후, 2016년 1월 정규 3집을 발매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