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흔들리는 물결> 연출 2001 <와니와 준하> 연출부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쭉쭉 가는구나 싶었는데 영화 한편 만드는 데 7년이나 걸릴 줄이야. (웃음)” <흔들리는 물결> 시나리오는 김진도 감독이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썼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전공 졸업작품이다. 당시 그는 마감날을 한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는데 아이템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하나는 병원 방사선과 기사가 방사선 사진을 보는 이미지였고, 또 하나는 그 남자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미지였다. “방사선 하면 죽음이 떠오르지 않나. 이 두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쓰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룰 수 있겠다 싶었다. 지도 교수였던 이창동 감독님께서도 그전에 냈던 아이템 모두 ‘가짜 같다’고 하시다가 ‘이 얘기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청년필름의 이선미 프로듀서가 이 아이템을 마음에 들어해 작업을 함께하게 됐고, 한달 반 만에 초고가 나왔다. 그때가 2008년쯤이었다.
시나리오 초고, 그러니까 졸업작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버전과 완전히 달랐다. 죽음이라는 주제와 제목만 똑같을 뿐이었다. “총 5고까지 썼는데 3고까지가 초고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PD님께 한달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마음대로 고쳤다.” 그게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평생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고 있는 병원 방사선과 기사인 연우(심희섭)가 원희(고원희)라는 같은 병원 간호사를 만나면서 마음을 조금씩 여는, 지금의 이야기가 됐다. 그 뼈대를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한 비밀의 화원 심현우 대표와 제작을 진행한 이지연 프로듀서, 두 여성 프로듀서의 조언을 받아 원희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다른 시나리오를 쓸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가 있다. 남자 캐릭터는 나름 잘 표현하는데 내 이야기 속 여성 캐릭터는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하더라. 창녀 아니면 성녀. (웃음) 연애 경험이 없냐고? 연애를 거의 안해봤다. (웃음)”
남자 연우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을 가진 여자 원희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게 이끌어가야 했던 까닭에 두 주인공을 누가 맡을지가 영화의 관건이었다. 연우 역을 맡은 배우 심희섭은 심현우 대표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심)희섭씨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을 막 끝낸 뒤였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우리가 찾던 모습과 딱 맞았다. 어른인데 맑고 투명한 소년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촬영 전, 그에게 주문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감정과 행동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원희 역을 연기한 고원희는 캐스팅 매니저로부터 받은 그녀의 사진을 보고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니 순수한 느낌이 좋더라. 시나리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 어떤 대사가 너무나 공감된다고 펑펑 우는 게 아닌가. 이 친구는 원희라는 여자를 연기할 수 있는 재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게 수월했다면 두 배우가 감정과 행동을 섬세하게 보여준 덕분일 것이다.
시간이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더라면 다른 아이템으로 고개를 돌릴 법도 한데,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고민이 무척 많았다. 아버지가 51살 때 저를 낳아주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부모님한테 잘하라는 얘기를 형이나 누나로부터 항상 들으며 자랐다.” 대학 시절 일본어를 전공한 그는 막연히 영화를 하고 싶어 “말도 안 되는 단편영화를 다섯편 정도 찍”었다. 당시 잘나가던 우노필름에 이력서를 냈고, 우노필름에 있던 지인의 소개로 청년필름에 들어가 <와니와 준하>(감독 김용균)의 연출부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 뒤, 김성수 감독이 운영했던 제작사 나비픽쳐스를 비롯해 여러 현장을 4년 정도 거치다가 영상원 시나리오 전공으로 들어갔다. 연출 전공이 아닌 시나리오 전공을 택한 것도 “장편영화를 빨리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편을 찍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빨리 장편을 찍어서 데뷔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 장편 데뷔하게 될 줄은….” 그럼에도 지난 7년 동안 영화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공무원처럼 언제나 매일 아침 9시에 도서관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가 엎어지든, 진행되든 계속 작업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난 7년 동안 두달 정도 빼고 쉰 적이 없다. 제작자가 좋아할 것 같다고? 지금까지 마감은 무조건 지켰다. 그동안 써놓은 장편 시나리오도 11편이나 있다. (웃음)”
어쨌거나 <흔들리는 물결>에서 보여준 죽음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죽음과 폭력 그리고 가난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이야기의 반복되는 주제이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 희망, 동경, 그리움 같은 개념들이 긴장된 상태에 있는 것도 죽음의 반대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차기작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주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제가 탄탄하면 캐릭터도, 뒷심도 있다. 아레스가 전쟁의 신이지 않나.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폭력이라는 개념을 끌고 간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폭력은 잔인한 동시에 성스러운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력과 사랑,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개념을 좀더 구체화해보고 싶다.”
요즘 꽂힌 것
<소통과 거짓말>
“부산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자극이 됐던 작품은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이었다. 창작자는 고통이라는 감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예술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 박찬욱, 이창동, 김기덕 감독님을 좋아하는 것도 그들의 영화를 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소통과 거짓말>은 과장하고 엄살 떠는 영화와 거리가 먼,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첫 작품임에도 카메라의 위치도 탁월했고. 이 작품 말고 머릿속에는 폭력과 사랑에 대한 생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