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주간. 해운대의 밤은 밝고 소란했다. 대기업 투자자와 유명 감독들이 중력처럼 사람을 끌어가고 남은 빈자리에서, <소수의견>으로 연을 맺은 배우 권해효씨와 동틀 때까지 술을 마셨다. 특별한 배우다. 영화에서 주어지는 한정적인 역할을 소화할 때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일 때 눈부시게 빛나는. 정교하고 단단한 사유, 날카롭고 넉넉한 언어, 강박적으로 엄격한 윤리관, 소탈하지만 세련된 인품. 스크린은 그를 포장하기는커녕 밀봉시켜버린다고 느껴진다. 권해효가 권해효 같은 배역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 수준의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우니까. 나는 어떤 작가에게도 그처럼 깊고 그득한 지적 품위를 느껴본 적이 없다.
영화 미술로 경력을 시작한 권해효는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충무로 시스템의 막바지 세대였던 셈이다. 그때와 지금, 한국영화가 어떻게 달라졌냐는 질문에 그는 잔을 단숨에 비워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장에 모니터가 도입됐지. 그때 카메라 독점 권력이 붕괴됐어. 그전까지는 모든 배우와 스탭이 감독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을 완전무결한 프레임을 신처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지. 심지어 영화가 산으로 가고 있어도. 누구도 뷰파인더에 접근할 수가 없었으니까. 요즘은 모니터를 모든 스탭이 빙 둘러싸고 막내까지 의견을 내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잖아? 하지만 여전히 감독의 결정권에 대항하기는 쉽지 않지. 권력의 구조가 투명해지면서 오히려 그 힘의 크기와 역할이 드러난 거야. 그리고 2000년대에는 디지털카메라가 도입되면서 필름의 신성성이 깨졌지. 필름 비용이 표현 시도를 절대적으로 제약하던 시대에서 해방된 거야.”
그의 회상은 마치 한국 현대사처럼 들렸다. 90년대 군사정권이 막을 내렸고, 좁고 폐쇄적인 뷰파인더보다는 투명한 개방형 모니터에 가까운 선거의 시대가 열렸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권력이 물리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기저를 갖는 것임을 절실히 알게 됐다. 힘의 신화적 외설성이 그 본질을 가려왔던 것이다. 또한 2000년대 보급된 인터넷은 의사표현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여전히 예민한 문제이되, 더이상 전처럼 신성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언론과 출판 자체가 신성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용의 문턱을 대폭 낮춘 대안환경은 해마다 성장하며 제도권 매체를 갈음하고 있다. 매체 제약의 해방은 곧 표현 제약의 해방을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채, 유토피아적 정치를 향해 거리낄 것 없이 나아가는 것만 같다. 그건 어떤 곳일지. 이 탁월한 통찰을 나 홀로 귀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영화의 유비를 불러내게 했다. 천만명의 지지를 받는 두편의 대작을 제외한 나머지 군소 영화들이 늪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