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왓슨] 특별한 영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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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왓슨] 특별한 영리함

글 김현수 2015-10-20

<리그레션> 에마 왓슨

<리그레션>

<리그레션>은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행됐던 사탄 의식의 피해자 안젤라(에마 왓슨)가 건실한 형사 브루스 케너(에단 호크)와 함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건을 파헤치는 영화다. 에마 왓슨이 연기하는 안젤라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해왔고 이상한 의식에 끌려갔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한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간 그녀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고자 하고 그길로 그녀는 브루스 형사에게 용기 있는 고백을 한다. 그 덕분에 브루스 형사는 수사를 진행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수사에 참여하는 경찰의 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대로 수사 협조를 하지 않고 어쩌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연루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부 고발자가 된 안젤라의 불안한 표정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상징한다. 어쩌면 최근 독특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에마 왓슨이 연기했기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도 전세계가 그녀를 영원한 호그와트 출신 배우로 기억하고 있지만 에마 왓슨의 이름을 구글링하면 연예 기사가 아니라 국제 뉴스 카테고리에 담긴 기사들이 먼저 검색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에마 왓슨은 지난해 유엔 성평등대사에 임명되어 활동 중이다. 여성인권신장 캠페인 ‘He For She’ 홍보도 담당하고 있으며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즉 페미니즘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가감 없이 SNS상에 드러내기도 한다. 그녀의 이런 움직임은 연일 매체를 통해 보도된다. 가장 최근 검색되는 그녀의 기사는 할리우드 여배우 출연료 문제에 대해 발언한 제니퍼 로렌스에게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는 기사다. 동료 남자배우들이나 스포츠 스타들과 열애설이 올라도 매일 오를 나이에 그녀는 지금 자신을 둘러싼 화이트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영화 촬영 도중에는 한여름 휴양지가 아니라 유엔 성평등대사로서 잠비아와 방글라데시를 방문하기도 했던 그녀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보낸 길고 긴 청소년기를 지나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성인으로서 에마 왓슨의 이같은 행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과연 그녀의 사회 참여 활동과 배우의 연기 인생을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건 그녀가 힘겹게 뚫고 지나온 유년 시절의 터널이 친구들과 연대해서 싸워나가는 법을 체득하게 해준 <해리 포터> 시리즈라는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녀의 특별한 성공 신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학벌 중심 사회에서 명문대생 출신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혜택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의 지금 모습은 모든 주어진 조건을 영리하게 활용하면서 사는 듯 보인다.

그녀가 자신의 삶과 우리가 사는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와 인식은 공식적인 사회문제 발언 이외에 배우로서 걸어오고 있는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난다. 2009년 이미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돈을 번 여배우’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패션 브랜드 샤넬의 모델로 활동하며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녀가 택한 출연작은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었다. ‘헤르미온느’라는 역할을 위해 지난 10여년 넘게 길러왔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른 뒤 맡은 역할은 물론 마릴린 먼로가 아니었다. 전체 등장 시간을 더해도 10분 남짓 되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성급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이제 됐다는 듯 세상에 내놓은 차기작은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의 <월플라워>였다. 그녀가 연기한 고등학생 샘은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 말 못할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누구보다 해맑게 삶을 긍정하는 소녀였다. 샘은 친구들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질 미래를 기대하고 설계하는 법을 공유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캐릭터다. 음악은 스미스와 아이즈를 좋아하며 레코드로 듣는 걸 선호했던 빨간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캐릭터 샘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세상 모든 ‘월플라워’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건네던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시 영화를 완성한 뒤 프로모션 월드투어를 다니는 동안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은 “이렇게 외롭고 고단한 일을 9살 때부터 해왔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에마 왓슨에게 특별한 존경심마저 생겼다고 말한 적도 있다. 갑갑한 일상에 치여 제대로 자신을 발산하지 못했던 에마 왓슨의 어떤 욕망이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에게는 보였으리라. 물론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듯 에마 왓슨의 연기 역시 과감했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 영화에 등장했던 졸업 파티 등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터였다. 대부분의 아역스타 출신 배우들이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십대 시절의 빈 공간을 <월플라워>라는 영화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됐다.

에마 왓슨은 전세계 십대들의 워너비로서 자신이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스타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작품을 통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월플라워> 이후 선택한 <디스 이즈 디 엔드>와 <블링 링>은 거의 그녀 자신을 연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기반영적인 캐릭터였다. 그녀는 절도를 저지르고도 “카르마를 믿고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성숙한 계기가 됐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캐릭터 니키를 통해서 마치 자기자신을 조롱하는 게 재미있다는 듯 통쾌하게 연기해 보인다. 어쩌면 이는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똑바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인처럼 보인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동료 배우들과 장난치는 모습이 여과없이 카메라에 담겨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처럼 털털함을 과시하는 여유도 부릴 줄 아는 것이다.

<리그레션>의 안젤라는 마을 사람들의 잔혹한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늘진 눈두덩에서는 다른 생각이 읽히기도 한다. 그동안 에마 왓슨이 연기했던 캐릭터가 대부분 발산하는 역할이었다면 <리그레션>의 안젤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야 하며 주변 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껏 연기해왔던 캐릭터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인물을 선택한 그녀의 차기작은 정치 쿠데타를 소재로 한 플로리안 갈렌베르거 감독의 <콜로니아>다. 여전히 사회문제를 발언하길 주저하지 않는 유엔 홍보대사로서의 그녀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영화다. 그런데 그녀는 디즈니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빌 콘돈 감독의 <미녀와 야수> 실사판 영화화에도 캐스팅됐다. 물론 그녀의 역할은 미녀 벨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녀가 연기했던 <월플라워>의 샘의 대사가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겉모습이 아닌 진짜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원하는 에마 왓슨이 정치라는 색안경 없이 바라봐달라는, 그래서 관객에게 “나를 사랑해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은 아닐까. 지구를 대표하는 미녀의 아름다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우둔한 야수가 어디 있겠는가.

<월플라워>

우리 모두의 첫사랑

런던에서 자란 에마 왓슨은 <월플라워>를 찍으면서 태어나 쇼핑몰을 처음 가봤다고 한다. 모든 아름다운 첫 경험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샘은 자신을 좋아하는 찰리(로건 레먼)를 방으로 불러 “우리 이야기를 써보라”며 타자기를 선물한다. 새빨간 앙고라 민소매 스웨터를 입고서 “이제야 제대로 사는 것 같다”며 아픈 과거를 고백하고 교감을 나누는 순간은 정말 영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명장면이다.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한 남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꼽기도 했다. 샘이 찰리에게 키스를 선물하면서 “너의 첫 키스 상대는 널 사랑하는 사람이 해줘야 한다”고 말할 때, 에마 왓슨은 우리 모두의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