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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컴턴에서 왔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으로 돌아보는 1980~90년대 미국 흑인 사회와 갱스터랩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Straight Outta Compton, 이하 <SOC>)의 기세가 놀랍다.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며 시대를 뒤흔든 힙합 그룹 N.W.A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현재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이다. 영화에 대한 평 역시 좋은 편이다. ‘로튼토마토’의 신선함 지수가 90%라면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호평 뒤에는 ‘드라마’의 힘이 있다. <SOC>는 정공법으로 충실하게 밀어붙인 영화다. N.W.A 멤버 각자의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그들이 모이게 되는 과정, 그룹 내에서의 역할 분담, 성공의 요인, 명곡의 탄생 동기, 갈등과 위기, 끝내 무산된 재결합까지 사실에 근거해 밀도 높게 담아냈다. 힙합을 모르거나 심지어 싫어하더라도 매력적으로 느끼게끔.

물론 어쩔 수 없이 ‘미화’ 논란도 있기는 하다. 닥터 드레가 1991년에 여성 힙합 저널리스트 디반즈를 폭행한 사실, 또 닥터 드레와 이지-E간의 격렬한 ‘디스’전이 담기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다. 그러나 전자는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으나 삭제된 사실이 밝혀졌고, 후자는 한명이 고인이 된 지 20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 다시 들추기가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한팀에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강렬하게 비방하고 깎아내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미화 수준이라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이 영화는 제법 많은 치부와 어두운 면을 놓치지 않고 있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영화가 ‘잘’ 나온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현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고 거칠 것이 없던 래퍼가 에이즈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 앞에서는 제아무리 잘난 이라도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흡사 그리스 비극마저 연상하게 하는 이 ‘실화’는 마치 영화화를 위해 미리 준비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실화의 디테일을 모조리 챙겨줄 당사자들, 즉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 이지-E의 아내 등이 모두 영화 제작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 역시 축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바로 영화의 감독이 F. 게리 그레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게리 그레이는 <이탈리안 잡>이나 <모범시민>의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실은 수십편의 흑인 음악 뮤직비디오를 감독한 인물이다. 그는 아이스 큐브, 닥터 드레와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며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고, 아이스 큐브와는 감독과 배우로서 코미디영화 <프라이데이> 시리즈라는 더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

이렇듯 그는 영화 당사자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유년기를 ‘길거리’에서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N.W.A 멤버들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은 게리 그레이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덕분에 게리 그레이는 ‘상상’ 대신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에 이지-E가 들어가 있던 ‘마약하우스’를 굴삭기 같은 기계가 한순간에 파괴해버리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기계의 이름은 배터램(Batterram). 1980년대 게토의 흑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실존 장비로서, 마약 단속을 구실로 경찰이 남용(?)하던 거대한 파괴기계였다. 1985년에 흑인 래퍼 토디티가 발표한 싱글 《Batterram》은 바로 이 배터램이 흑인의 삶을 파괴하는 것에 관한 노래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N.W.A 멤버들의 음악을 미리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N.W.A가 활동했던 당시 컴턴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컴턴은 캘리포니아의 LA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다. 조금 더 위에 위치한 도시 와츠와 함께 흔히 LA의 대표적인 게토로 분류된다. 주변 도시에 비해 흑인/히스패닉 인구 비율이 높고 실업률 역시 높으며 사건 사고가 잦다. 말 그대로 ‘위험하고 가난한 동네’다.

1980년대 미국은 극우세력의 보스인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였다. ‘복지 여왕’(Welfare Queen)이라는 허상이 증명하듯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특히 게토 흑인에게 직격탄으로 날아왔고, ‘크랙 에피데믹’(Crack Epidemic)이라고 명명된 코카인 파동 역시 흑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컴턴이 위치한 사우스센트럴 지역은 1980년대 들어 자동차 산업이 붕괴되어 일자리가 모두 없어짐으로써 많은 흑인이 몰락을 경험했다. 여기에다 고정자산세에 상한선을 거는 개정안이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되었고, 국방비에 과다 지출을 한 공화당이 복지 부담을 지방자치기관에 떠넘기면서 컴턴처럼 유색인종이 많고 젊은 인구 비율이 높은 도시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N.W.A로 상징되는 ‘갱스터랩’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지점과 연관된다. 갱스터랩은 불법적인 거리의 삶을 찬양하고 폭력, 섹스, 쾌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는 메시지를 담은 힙합의 하위장르를 가리킨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것처럼 갱스터랩은 수많은 도덕적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아이스 큐브는 대답한다. “우리의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뿐입니다.” ‘리얼리티 랩’(Reality Rap), 즉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동네’의 현실을 담았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아이스 큐브는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이 외면하는 게토 흑인의 실상을 고발하는 저널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은 위험한 빈민가에 사는 흑인의 삶에 관심이 없으며, 그곳에 사는 흑인의 삶은 실제로 우리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아름답지 않은데 어떻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다. 과연 음악 속 가사가 문제인 걸까, 음악 속 가사를 있게 한 현실을 만든 장본인과 그 시스템이 문제인 걸까. 이 영화는 이런 고민을 안기기도 한다.

N.W.A의 실제 파급력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 N.W.A가 “우리는 컴턴에서 왔다”고 외치기 시작하면서 힙합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N.W.A로 인해 컴턴은 순식간에 힙합과 갱스터랩의 성지로 발돋움했다. N.W.A가 브루클린을 위시한 ‘동부’ 힙합과 달리 초라했던 ‘서부’ 힙합에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라디오플레이나 심의를 의식하지 않았던 그들의 음악은 후대 아티스트에게 ‘나다움’에 대한 깊은 영감을 안겼다. 그들의 욕설이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 이라도 N.W.A의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내뱉고 있잖아?” N.W.A는 아티스트가 나다움을 온전히 지켜내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그룹이었다.

힙합 황금기의 유산

이 영화의 개봉을 전후로 줄줄이 제작이 예고된 힙합영화들의 큰 흐름도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스눕독과 투팍에 대한 영화, DJ 프리미어의 그룹이었던 듀오 갱스타에 대한 영화 등이 예고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흐름이 결코 우연이나 인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맥락은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가 당시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등장한 것과 어쩌면 비슷할지 모른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는 흔히 힙합의 ‘황금기’라 불린다.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힙합의 고유한 사운드와 멋이 가장 순수한 모양새로 만개했던 시기라는 이유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힙합은 수많은 논란과 열광을 거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힙합을 듣고 자란 이들은 이제 영화도 제작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때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를 찾아왔다. 황금기를 다시 돌아보고, 유산을 건져올리며, 무언가를 배우고 또 알리는 것이 즐겁고 마땅하게 여겨지는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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