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는 유일하다. 출발은 얼추 비슷해 보여도 오직 두 사람이 공유해온 시간은 세상 둘도 없는 형태로 빚어진다. <춘희막이>는 전처와 후처로 긴 세월 함께한 두 할머니의 2년 남짓한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막이 할머니는 태풍과 홍역으로 두 아들을 잃고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후처로 춘희 할머니를 들였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8~9살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춘희 할머니를 차마 돌려보낼 수 없어 함께한 지 어느덧 46년. 남편이 떠나고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도 두 사람의 동행은 계속된다.
전처와 후처, 친구, 자매, 자식들의 어머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단어로도 두 할머니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카메라도 두 사람의 일상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한적한 시골 동네의 하루하루. 사건이랄 것도 없다. 농사짓고 밥을 지어먹고 가끔 장을 보는 반복된 생활에 기승전결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박혁지 감독은 두 할머니의 미묘한 교감을 바탕으로 가능한 다양한 앵글과 구성을 동원해 여러 표정을 만들어낸다.
<춘희막이>는 얼핏 시골, 노인, 감동의 키워드로 묶인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연상시키지만 그 결은 사뭇 다르다. 내레이션을 절제한 다큐멘터리는 오직 화면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도록 이끈다. 나란히 굽은 등,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두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 구박과 애정을 한몸에 받는 개 덕구, 심지어 허물어져가는 지붕에도 두 할머니의 표정이 걸려 있다. 여기에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음악은 서사 대신 서정을 더한다. 무심한 듯 서로를 챙기는 두 할머니처럼 이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에도 아닌 척하지만 애정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