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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애프터 다크>
문동명 사진 최성열 2015-09-22

<애프터 다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권영주 옮김 / 비채 펴냄

밤 11시56분, ‘우리’는 마리와 에리 두 자매를 지켜본다. 마리는 패밀리 레스트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트롬본을 든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언니 에리를 들먹이며 대화를 잇다가 휴대폰 번호를 남기고 떠난다. 어두운 방 안에는 에리가 잠들어 있다. 두달 동안 긴 잠에 빠져 있는 그녀의 방에는 얼굴 없는 남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마리에게 큰 덩치의 가오루가 찾아오고, 그녀의 청을 따라 호텔 알파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리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언니를 생각한다. 에리가 잠에서 깨면 그 남자는 자리에 없다. 새벽 6시52분, 마리는 집에 돌아와 에리와 함께 잠을 청한다. ‘우리’는 마리와 에리를 지나 아침의 새 햇살을 지켜본다.

“보이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다”로 첫 문장을 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는 ‘우리’가 각자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중요한 소설이다. ‘나’라는 화자를 고집해온 그가 1인칭 복수인 ‘우리’를 화자로 내세워 소설에 카메라적인 시선을 더한 것이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내 땅거미처럼 부옇게 진행되는 서사는, 여느 하루키 소설처럼 매력적인 말을 통해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좀체 난해함을 벗지 않고 흐르듯 결말로 향해간다. 그래서 소설의 공간 여기저기를 부유하며 담겨진 영화 같은 이미지들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접근은 <애프터 다크>가 본디 하루키가 평소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던 <Tante Zita>(일본 개봉명 <어린 풀이 돋아날 무렵>, 감독 로베르트 엔리코, 1969)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아예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봐야겠다고 결심한 데서 비롯됐다는 사실과도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 뤽 고다르의 그림자가 어른댄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떠다니던 시선이 갑작스럽게 클로즈업되는 분방함, 장마다 마리와 에리를 오가는 점프컷은 대번에 고다르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마리가 사람들을 만나는 호텔 이름이 그의 1965년작 영화 <알파빌>에서 빌려왔음은 소설 속에도 직접 언급돼 있다. 하루키는 얼마 전 진행한 Q&A 프로젝트 ‘무라카미의 공간’ 중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고다르는 젊었을 때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남긴 바 있다.

‘나’가 아닌 ‘우리’를 내세운 소설

방 안은 어둡다. 하지만 우리 눈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다.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 마리의 언니 에리다. 아사이 에리.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알겠다. 어두운 물이 흘러넘친 양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펼쳐져 있다.(32쪽)

…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다.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 쪼가리잖아? …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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