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9월, <씨네21> 북엔즈에 야심찬 책 셋이 꽂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8>,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이 바로 그것. 세 작가는 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을, 오랜 인기를 자랑하는 연작의 기틀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 속 진실을 허물고 더 나은 다음을 궁리했다. 하루키와 정병설은 이미 그다음을 목격하고 있고, 이제 막 따끈따끈한 결과물을 내놓은 유홍준은 한창 독자들의 반응을 살필 것이다.
하루키의 인물은 대개 ‘나’였다. ‘내가’ 미도리를 사랑했고, ‘내가’ 사에키와 미친 듯이 몸을 섞었다. 하지만 <애프터 다크>의 화자는 ‘우리’다. 1인칭 복수인 ‘우리’는 소설 전체에 자리해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한순간도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낯선 형식 때문일까, <해변의 카프카>(2002)와 <1Q84>(2009) 사이에 쓴 장편소설 <애프터 다크>는 발표 당시 하루키 팬들에게도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는 <애프터 다크>의 실험적인 시도가 아주 만족스럽고, 그 작품을 쓰며 다진 근육이 <1Q84>를 완성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고 말한다. <1Q84>는 아오마메, 덴고, 그리고 우시카와 세 사람의 목소리를 교차하면서 보다 비옥한 ‘하루키 월드’를 열어젖혔다.
1993년 첫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후 22년 만에 세상에 나온 여덟 번째 시리즈는 지난 작품들에 비해 힘을 덜어낸 티가 역력하다. “유적 우물에 대한 설명이 전보다 길어”졌고, “따지고 비판하는 것이 줄어들고 슬슬 얘기하는 분위기”가 됐다. 저자 유홍준은 이를 미술에 국한했던 접근 방식을 역사, 문학, 민속, 더 나아가 자연까지 넓히면서 따른 변화라고 말한다. 딱딱하지 않은 와중에도 엿보였던 미술평론가 특유의 비평의 시선은 줄고, “달밤에 시골집 툇마루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나 제자들에게 얘기”하는 듯한 둥글둥글함이 먼저 보인다. 이 거대한 시리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정해진 바가 없지만, 아홉 번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6권 ‘인생도처유상수’의 경복궁, 광화문에 이은) 서울 편이 될 거라고 한다.
정병설은 국문학자로서 조선 역사의 영원한 스캔들인 임오화변에 관한 기존의 사관(史觀) 반대편에 서서 <권력과 인간>을 써냈다. 김만중의 <구운몽>과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옮긴 옛 우리말에 대한 뛰어난 독해력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의 처절한 죽음이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에 떠밀린 탓이 아닌, 제 광기를 이기지 못해 영조에 반역을 저지르려다 비롯된 것이라는 정황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책이 발간된 2012년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정병설의 견해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아주 오랫동안 뿌리 깊게 이어져온 당쟁희생설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라는 인식을 끌어냈다. 추석 연휴를 맞아 이준익 감독의 <사도>를 관람할 이들에게 <권력과 인간>을 힘주어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