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 가방을 든 남자가 런던 빈민가 골목에 스며든다.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은 아마도 길고 날카로운 외과용 칼과 뼈를 가르는 데 필요한 도구일 것이다. 그는 비명 지를 틈도 없이 한 여자를 죽일 수 있고 30분 안에 자신이 원하는 내장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다. 누구도 그 얼굴은 알지 못한다. <프롬 헬>이 되살려낸 살인자 ‘잭 더 리퍼’는 그처럼 완벽하게 살인을 집행한, 안개 속에 녹아들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범행을 저지른, 연쇄살인마였다. 그는 빅토리아시대의 불분명한 회색 공기와 함께 태어났고 그 시대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를 키운 위선의 시대. 빅토리아시대 섹스와 죽음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 편집자
1888년 8월31일 새벽, 런던의 악명 높은 빈민가 화이트차펠 거리에 한 여자가 누워 있다.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찢기고 창자가 사라졌으며 치마가 허리까지 올라간 채 버려진 창녀. 그때까지도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던 그녀는 ‘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몸을 팔았던 42살의 메리 앤 니콜스였다. 그리고 런던 밤거리를 공황상태로 몰고 간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첫번째 희생자이기도 했다. 영화 <프롬 헬>은 그뒤 네번의 살인을 더 저지르면서도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잭 더 리퍼가 왕실을 보호하려다 지나친 광기에 휘말린 귀족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이 무시하고 지나쳤던 한 목격자에 따르면 잭 더 리퍼는 <프롬 헬>의 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잿빛 혹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키는 5피트4인치가 조금 넘는 중년 남자.목격자는 그 남자가 '외국인(foreigner)'처럼 생겼다고 표현했는데, 이 단어는 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을 일컫는 일상용어였다. 그 증언을 믿는다면, 잭 더 리퍼는 모순이 가득했던 빅토리아시대와 함께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썩어가는 뒷골목의 악취에 갇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부패해갔을지도 모른다.
비열한 거리, 범죄로 먹고산 사람들
“이 거리는 이스트 엔드,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는 곳이다. 이스트 엔드는 거대한 도시고 충격적인 장소이며 숨겨진 악(惡)의 신경이 살아 꿈틀대는 빈민가다. 더러운 사람들은 밥 먹듯 진을 마셔대고 깨끗한 셔츠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 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가진 이스트 엔드 주민들은 누구도 머리를 빗지 않는다.” 작가 아서 모리슨은 <비열한 거리의 이야기>(Tales of Mean Streets)에서 화이트차펠이 있는 런던 이스트 엔드 지역을 이렇게 묘사했다. 잭 더 리퍼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이 든 창녀들에게 서글픈 종지부를 찍어주던 1880년의 화이트차펠은 이처럼 비참한 곳이었다. 1만2천명의 창녀들이 거리에서 영업중이었고 골목마다 빈민구호소가 있었다. 이곳 여자들은 술 마실 돈이 떨어지거나 집세를 낼 수 없을 때마다 몸을 팔러 나갔다. 이스트 엔드 지역을 찾은 한 작가는 일곱명이 몰려 살던 지하의 한 부엌에서 죽은 지 13일 된 갓난아이 시체가 뒹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이스트 엔드는, 당시 영국에선 존재하지 않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빅토리아시대는 자본주의의 번영과 금욕이 맞물리면서, 범죄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추방하다시피 한 기묘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프롬 헬>의 원작만화를 그린 앨런 무어는 깨끗한 침대에서 비단 잠옷을 입고 일어나는 살인자와 여러 명의 창녀들이 딱딱한 나무 벤치에서 함께 자는 모습을 대비해 빅토리아시대의 위선을 폭로하려 하기도 했다. 누구나 거리에서 여자를 살 수 있었지만, 잭 더 리퍼가 창녀의 성기를 도려냈다는 사실은 너무 부끄러워서 신문에 오르지 못했던 시절. 잭 더 리퍼는 겹겹이 바른 벽지 사이에서 부패한 가스가 부풀어가듯, 허술한 위선의 틈새에서 솟아나온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빅토리아시대는 잭 더 리퍼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섹스와 죽음이 유럽을 지배했을 때
잭 더 리퍼가 두번째 희생자 애니 채프먼과 함께 그림자진 골목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목격자는 그가 서른여덟에서 마흔살 사이로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존했던 연대는 184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정도. 한 가족의 머리를 나무 망치로 부숴 살해하는 것처럼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잔인한 살인사건들이 유럽과 신대륙을 경악하게 하던 시기였다.
‘빨간 오두막 살인사건’은 잭 더 리퍼가 나타나기 60년 전에 일어났지만 20세기까지도 꾸준히 연극으로 상영된 사건이다. 영국의 농부 윌리엄 코더는 형의 사생아를 사산한 적이 있는 헤픈 마을 처녀 마리아 마텐과 결혼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마리아와 자주 밤을 보내던 ‘빨간 오두막’으로 그녀를 불러냈는데, 그날 밤 이후 마리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순한 가출로 치부됐던 마리아의 실종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녀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해당한 딸이 빨간 오두막에 묻히는 악몽을 꾸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마리아가 사라지던 날 코더가 삽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경찰이 빨간 오두막을 뒤졌을 때 부대에 담긴 부패한 마리아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건은 섹스 스캔들이 결합돼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성기를 ‘말할 수 없는 곳’이라거나 ‘은밀한 장소’라고만 표현할 줄 알았던 그때 사람들은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67년 영국 햄프셔주에서 일어난 프레데릭 베이커의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우울증이 있기는 했지만 성실했던 청년 베이커는 패니라는 여덟살짜리 여자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패니의 어머니는 혼자 돌아온 베이커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이는 이미 토막토막 잘려 갈대밭에 흩뿌려진 다음이었다. 경찰은 그의 옷에 핏자국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가 아이를 죽이기 전 옷을 모두 벗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강간사건 중 4분의 3이 유아강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그리 놀라운 것만도 아니었다.
성과 관련된 살인은 그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1871년 유세비어스 피에대그넬은 자고 있던 여자를 죽인 뒤 피를 보며 사정한 사건을 비롯해 7건의 살인을 고백했다. 1874년에는 열살짜리 여자아이와 네살 먹은 사내아이를 칼로 수십번 찔러 살해한 소년 제이스 포메로이가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진술했다. 1880년 파리에서는 지능이 모자란 젊은이 루이 메네스클루가 여자아이의 시체와 하룻밤을 보낸 뒤 팔을 잘라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체포됐다.
빅토리아시대의 살인사건들은 이전과 달리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복동생의 목을 잘라 화장실에 넣거나 아버지와 계모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사건은 모두 원한이 그 동기였다. 스스로 회고록을 쓴 유명한 살인자 라스네르처럼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며 그 때문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경우도 있었다.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은 이 살인자들을 그저 비정상적인 괴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평소 눈에 거의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인정해주지 않는 바깥 세계 때문에 그들은 칼과 도끼를 들었던 것이다. 잭 더 리퍼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사진의 발달, 공포에 불을 붙이다
막 널리 쓰이기 시작했던 사진이 없었다면 잭 더 리퍼는 런던을 휩쓴 공포를 낳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남아 있는 희생자들의 사진은 드러나 있던 하반신을 가리거나 목의 상처를 꿰맨 모습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희생자 메리 켈리의 사진은 희생자들 중에서도 가장 처참했던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잭 더 리퍼는 도살업자나 정육점 주인, 은밀하게는 외과의사를 수사선상에 올려놓을 만큼 정교한 해부 실력을 자랑했다. 너비 1인치 길이 6인치로 추정되는 그의 칼날은 메리의 시신을 ‘조립’해야 할 정도로 샅샅이 파헤쳐 놓았다. 나체로 침대에 널려 있던 시체는 복부의 피부가 없는 상태였고 그 내부 역시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유방 한쪽과 콩팥은 머리 밑에, 다른 쪽 유방은 오른쪽 발 옆에, 간은 두발 사이에, 장과 비장은 침대 양쪽에서 발견됐다. 사라진 복부의 피부 조직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심장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잭 더 리퍼는 자신의 마지막 살인을 가장 현란한 스펙터클로 장식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는 한 창녀를 해부하려다 행인에게 방해를 받자 같은 날 밤 또 다른 창녀를 잡아 의식을 행할 만큼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살인자였다.
메리 켈리가 살해된 뒤 런던 군중은 히스테리에 빠져들었다. 붉은 머리를 가진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젊고 아름다웠으며 착했다. 그녀는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데 굶주린 런던 시민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희생자였다. 런던 밤거리는 텅 비었다. 창녀들은 친구들과 몰려다녔고, 여장한 경찰들이 거리 곳곳에서 잭 더 리퍼를 기다렸다. 진한 색 코트를 입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분노의 표적이 됐다. 화이트차펠 거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독 핍박받았다. 잭 더 리퍼가 두번의 살인을 저지른 날 밤 “유대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당해도 좋을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낙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분노와 공포가 가라앉은 것은 마지막 살인이 일어난 11월에서 몇달이 흐르도록 다른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였다. 몇명의 용의자가 있었고 그중 자살한 사람도 있었지만, 잭 더 리퍼는 한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야생을 목말라하는 문명인들을 아직도 사로잡고 있다. 그는 진정한 살인마였다. 김현정 parady@hani.co.kr▶ 스크린 연쇄살인마의 원형 잭 더 리퍼 이야기
▶ <프롬 헬> 영화 vs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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