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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뷰티풀 마인드> 보고 천재 수학자들을 떠올리다
2002-03-14

살해된 모차르트들

● 내시 균형이라는 말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복거일씨 글에서였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별 뜻 없이 경제학과 강의실을 기웃거리기도 했던 터라 혹시 그 전에도 그 말이 내 귀를 스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장기 기억으로서 내 뇌리에 박히지는 않았다. 10여년 전에 쓴 어느 글에서 복거일씨는 이인 비영합 경기의 비협력적 해결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경우에는 한쪽이 원래의 전략을 고수하면 다른 쪽은 원래의 전략보다 나은 전략을 찾을 수 없는 상황, 곧 내시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내시 균형은 여럿 있을 수 있으므로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양쪽에 점점 더 불리한 상태에서 균형이 이뤄진다. 복거일씨는 그 예로서 한쪽에서 추구한 군사력의 우위가 다른 쪽의 대응을 부르는 과정이 되풀이되어 결과적으로 처음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균형이 이뤄지는 상황을 들었다. 아무튼 내가 그 글을 읽은 것은 내시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기 전이었다. 그 뒤, 물론 내시가 노벨상을 받은 뒤에, 어느 잡지에선가 그의 ‘영화 같은’ 인생유전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뷰티풀 마인드>를 본 뒤에 떠올린 것이고,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내시의 이론은 물론이고 그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씨네21> 기사를 보니 <뷰티풀 마인드>에서 그려진 내시의 삶과 실제 삶 사이에는 꽤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특히 그 기사에서 내시의 정신분열증이 심해지자 아내 엘리샤가 이혼 청구를 해 1963년에 이혼이 성립됐다는 대목이 뜻밖이었다. 영화에서 그 부분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내시의 ‘뷰티풀 마인드’에 흠집이 났을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생애가 더 큰 울림을 얻었을 것 같다. 20대를 넘긴 이후의 그 어둠의 생애가 말이다. 존 내시가 내시 균형을 발견한 것은 20대 때다. 수학은 음악이나 시와 함께 천재가 생애의 이른 시기에 드러나는 분야다. 서른 넘어서 재능이 꽃피는 수학자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도 서른 이전의 젊은 학자에게만 준다지? 시인이나 음악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랭보의 때이른 절필이나 모차르트의 요절은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내가 수학사 책으로 읽어본 거의 유일한 것은 벨이라는 미국 사람이 쓴 <수학의 사람들>인데,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미 십대 때부터 뭔가 달랐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생애는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것이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도 그의 이름이 한번 언급된다.

벨은 21살로 죽은 이 19세기 프랑스 수학자를 다룬 장의 제목을 ‘천재와 광기’라고 붙여놓았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니 갈루아가 예컨대 내시 같은 진짜 광인은 아니었다. 갈루아는 다만 자신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서 짜증스러워했을 뿐이다. 이 천재가 만약에 다른 분야로 발을 내디뎠다면, 그가 21년의 짧은 삶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시가 그랬듯 갈루아도 다행스럽게 수학을 택했고, 그래서 다른 분야의 거장들이 늘그막에야 이룰 만한 것을 16살에서 21살까지 5년 동안 이뤄냈다. 고작 60페이지에 불과한 <갈루아 전집>은 수학사의 한 스펙터클이다. 그래도 그의 요절은 아쉽다. 그가 도입한 군(群)이나 대수체(代數體: 이 개념들은 수학사전을 참조하시라. 여기 베껴놓기에는 너무 길고 전문적이다)의 개념들만으로도 갈루아라는 이름은 수학의 역사에서 불멸이 됐지만, 만일 그가 고종명했다면 인류는 또 한 사람의 가우스를 얻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짧은 삶은 주위 사람들의 몰이해와 관재(官災)로 휘청거렸다. 갈루아는 대수방정식이 대수적 해법(4칙 연산과 거듭제곱근 풀이)만으로 풀리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수학자들은 이것을 ‘갈루아 이론’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을 기술한 사람이지만, 진지한 수학사가들마저 그의 이름에서 방정식론보다는 파란의 삶을 먼저 떠올린다.

갈루아의 불행은 그가 동시대인들보다 너무 앞서나갔다는 데 있었다.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의 교사들도 제자의 천재를 알아보지 못했고, 파리 이공학교의 시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루아는 파리 이공학교의 입학시험에 두차례나 떨어지고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프랑스 수학의 산실이라고 할 만한 이 학교의 교수들에게는 갈루아의 천재를 알아볼 만한 지성이 없었다. 시험관보다 더 뛰어난 수험생은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갈루아의 예는 섬뜩하게 보여주었다. 그도 넓은 의미에서는 ‘살해된 모차르트’였다. 갈루아에게는 운도 없었다. 학사원에 보낸 논문들은 담당자들의 부주의로 늘 사무실 서랍에 처박혀 있었다. 7월혁명을 전후해 분출한 자신의 공화주의적 열정 때문에 갈루아는 또 감옥엘 들락거렸다. 갈루아는 하잘것없는 여자를 두고 벌어진 피스톨 결투로 죽었는데, 전기 작가들은 이 사건을 경찰이 놓은 덫으로 추측한다. 7월왕정의 권력자들이 보기에 이 청년은 매우 위험스러운 공화주의 선동가였던 것이다. ‘갈루아 이론’은 결투 당일 새벽에 집필되었다. 갈루아가 죽으면서 유일한 가족인 동생에게 남긴 말은 이랬다. “울지 마라. 스무살로 죽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 거야.” 대단한 용기가 없는 나는 벌써 그 두배 이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원래 하려던 얘기가 뭐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