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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폭풍과 안개의 존재이유
박수민(영화감독) 2015-09-01

영화가 도덕을 질문할 때- <스네이크 아이즈>와 <해무>

<스네이크 아이즈>

여름이면 다시 보는 영화가 있다. 피서용 납량영화는 아니다. 늦여름 바람 불고 벼락 치고 비 쏟아지는 밤에 혼자 보는 영화다. 영화사에 남는 위대한 걸작은커녕 IMDb 평점 6점도 못 넘었지만 나의 오독과 편애와 어떤 슬픔으로 다시 찾게 되는 영화. 심지어 결말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눙쳐버린 영화. 분명한 실패작.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관객이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네이크 아이즈>(1998)다.

허리케인 제제벨이 불어닥친 애틀랜틱시티. 호텔 카지노 겸 실내 경기장에서 복싱 헤비급 타이틀전이 열리고 미 국방부 장관도 보러온다. 꽃무늬 셔츠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자기 구역을 쏘다니는 릭(니콜라스 케이지)은 잔뜩 신이 나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 특유의 흥분한 액팅으로 보여지는 릭은 아내와 정부를 동시에 통화 대기시키며 승패 도박에 베팅하느라 바쁜 부패 형사다. 이 썩은 도시의 자칭 왕인 그는 나중에 시장으로 출마하려는 포부까지 있는데, 오늘 장관 경호를 맡은 케빈 던 중령(게리 시니즈) 같은 친구도 있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경기 도중 장관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릭은 자동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했을 때 얻을 이익을 셈한다.

도덕이 승리할 방법은 존재하는가?

TV 중계 화면에서부터 릭의 행선을 따라 관중이 운집한 링 앞까지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약간의 트릭은 있지만) 거의 실시간으로 13분간 이어진다. 일찍이 마틴 스코시즈가 <좋은 친구들>(1990)에서 보여준 전설적인 3분 스테디캠 시퀀스를 <허영의 불꽃>(1990)의 5분 스테디캠 오프닝으로 받아친 적이 있는 드 팔마는 영화 내내 시네마틱한 기교를 과시한다. 홍보문구처럼 1만4천명이 용의자인 군중 신은 압권이다. 앞서 우리가 본 오프닝을 마치 <라쇼몽>(1950)처럼 각자의 상황으로 다시 보여주며 화면을 분할하기 시작하면 드 팔마의 오랜 팬이나 영화 애호가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의 3분의 2는 영화적으로 정말 근사하다. 문제는 나머지다.

경기장 전체를 폐쇄한 릭은 장관 옆에서 뭔가 말하던 백발 가발을 쓴 의문의 여자를 쫓는다. 그녀는 처음엔 드 팔마가 줄곧 변주해온 앨프리드 히치콕풍의 금발 팜므파탈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원죄가 없는 캐릭터임이 밝혀진다. 지금은 섹시한 중년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연기하는 칼라 구기노가 순진무구한 20대로 분한 줄리아는 안경이 없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지독한 근시에, 목숨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 채 군수산업의 추악한 진실을 밝히러 온 내부고발자다. 죄 많은 남자들에게 죄 없는 여자란 클리셰는 단순하지만 힘이 세다. 드 팔마와 각본가 데이비드 코엡은 사건의 흑막 뒤의 인물이 게리 시니즈임을 굳이 오래 숨기지 않는다. 관객의 플롯 추리에 미리 선수를 치면서 영화는 빠르게 핵심으로 이동한다. 릭의 도덕적 딜레마가 그것이다. 그는 케빈보다 먼저 줄리아를 찾아낸다. 골치 아픈 진실을 알게 된 릭은 줄리아를 순순히 케빈에게 넘겨주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여자를 넘겨주고 모른 척 입 다물면 한몫 챙길 수 있다. 과연 한평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온 자가 생면부지의 여자를 살리겠다고 자기 삶에 반하며 제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소설이 아니므로 도덕에 대한 작자나 화자의 일장 연설을 설파할 수 없다. 물론 셰익스피어적인 대사를 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리 근사해도 연극적이지 영화적이진 않다. 드 팔마는 모럴의 문제를 니콜라스 케이지의 클로즈업과 이 숏을 받는 인서트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오프닝에서 도박에 베팅하기 위해 조무래기 범죄자를 족쳐 빼앗았던 피 묻은 지폐를 릭의 눈앞에 떨어트려놓은 것이다. 남의 피 묻은 돈. 의미심장한 소도구. 나의 기득권과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여자를 죽이고 모른 척한다? 잊고 살았던 도덕은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을 건드린다. 릭은 남의 피 묻은 돈을 다시 줍지 않는다. 그 결과 오늘 돈을 걸었던 복서에게 도전자 대신 죽도록 두들겨맞는다. 케빈은 관객과 마찬가지로 릭이 왜 이러는지 납득할 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최악의 패가 나왔다. 1만 두개, ‘뱀의 눈’ (Snake Eyes)이다. 이제 러닝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결말에서 릭을 구하고 도덕이 승리할 방법은 무엇인가?

<해무>

그것은 황당하게도, 우연의 자연재해였다. 허리케인이 그를 구한다! 정말이다. 두눈을 의심하며 영화를 다시 돌려도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드 팔마와 코엡은 플롯을 더 고민하기 귀찮았다기보다 애초에 이 결말을 더 밀고 나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실은 대규모 특수효과를 동원해 거대한 해일이 카지노를 덮치는 스펙터클한 엔딩을 구현했으나 어째선지 후반작업에서 대부분 잘려나갔고, 남겨진 부분이 지금의 결말이라는 더 거짓말 같은 이야기. 설마 드 팔마는 도덕이 인간을 구해줄 리 없으니 영화니까 신의 은총으로 해결하자는 지독한 농담을 한 걸까?

나는 영화가 결국 윤리를 다루는 예술이라 생각한다. 이 윤리는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 작가 스스로 상정한 자기윤리다. 작가 자신의 세계관에 의거한 어떤 도리, 철저히 개인적인 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윤리는 타자인 관객의 것과는 다르고 반대되는 철학일 수 있다. 작가가 이미 답을 준비한 영화는 관객에게 자기 윤리를 들이댄다. 관객이 거절하더라도 납득시키려고, 관객 각자의 윤리를 흔들어놓으려 한다. 그러나 도덕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다르다. 이런 영화는 답을 준비하기 전에 우선 제기한 도덕을 관객에게 묻는다. 윤리보다 도덕은 보편타당하다고 믿는 ‘우리’의 내면적 원리의 문제다. 당신의 양심은 먼저 이 도덕에 납득하는가?

영화가 믿고 있는 것

나는 폭풍이 불어닥친 카지노에 갇힌 영화에서, 안개 낀 바다에 배만 한 척 떠 있는 영화를 떠올린다. 심성보의 <해무>(2014)다. 이 영화 역시 도덕을 묻는다. 먹고살려고 몰래 실어날랐던 밀항자들은 유출된 가스에 질식해 모두 시체로 변한다. 유일한 사유재산이자 삶의 터전인 배를 포기 할 수 없기에 선장과 선원들은 사체를 바다에 내던진다. 문제는 그들 중 한 여자 홍매(한예리)가 살아 있는 것. 야만적일 만치 강한 성적 욕망을 억누르며 선상에 고립된 남자들에게서 그녀의 목숨은 위태롭고, 그나마 덜 야만적인 청년 동식(박유천)이 도덕의 부름에 답한다. <해무>가 상영되던 극장에서도 나는 결말부 <스네이크 아이즈> 때와 비슷한 코웃음치는 소리를 들었다. 납득의 실패. 관객에게 도덕을 묻는 영화가 신파가 되지 않고도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도덕을 묻는 영화들은 상황을 펼쳐놓다가 답은 에필로그에 남긴다. 그래서 주인공의 그 도덕적 선택이 의미가 있었냐고 관객이 던질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릭은 영웅이 되었다가 케빈이 예언했던 대로 과거의 부패가 드러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감옥행을 앞두고 줄리아가 찾아와 자신을 구해줘 고맙다고 말한다. <해무>에서 혼자 살아남은 동식은 홍매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라면에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달라 부탁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폭풍과 안개를 거쳐 도덕을 물었던 두 영화가 목표한 건 어쩌면 이런 것이다. 이 시시한 에필로그를 반드시 찍어 그 선택은 의미가 있었다고 선언하는 것. 현실을 살며 영화에 코웃음치는 우리가 지녔다고 도리어 영화가 믿고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에 호소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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