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유작 <인간실격>의 영향력 때문일까. 많은 이들에게 다자이 오사무는 패배의 아이콘이다. 그가 5번의 자살기도 끝에 죽음에 ‘성공’했다는 일화가 그가 쓴 작품들만큼이나 유명하다는 것 역시 그런 평가에 일조한 게 사실일 터. 하지만 근래 들어 불안과 절망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은 시대를 향한 솔직한 목소리이자 다이쇼오-쇼와의 격변기와 전쟁을 버텨낸 작가의 “강한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추세다.
‘창비세계문학’ 44번째 시리즈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 작품 가운데 페미니즘적 시선이 두드러지는 10개의 소설을 선별해 구성했다. 그의 삶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유년 시절의 영향으로 모성에 대한 애착이 묻어 있다. 이는 여성편력은 물론, 그의 소설에서 엿보이는 여성의 시선을 향하는 말이기도 하다. 1937년 <등룡>부터 1948년 <향응 부인>까지,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여성성이 짙은 작품들이 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창비의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 소설의 새로운 가치를 끄집어내는 선집이라 할 만하다. 여성과 육체라는 틀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연구해온 신현선이 번역과 해설을 맡았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린 여성의 양상은 작품 모두 미묘하게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수동적인 피해자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등룡>, 소녀의 하루를 세밀하게 관찰해 사춘기 여성의 우울을 드러내는 <여학생>(1939), 가난한 가정으로 인해 도덕적 타락을 고민하는 부녀자를 그린 <비용의 아내>(1947), 아름답고 순결무구한 어머니상을 완성해낸 표제작 <사양>(1947) 등 여러 군상을 통한 ‘다자이 오사무의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이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기에 발표한 소설들이 얼마간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그들의 고난을 늘어놓는 곳에서 그치는 데 반해, 완숙한 걸작을 발표하던 때는 여성을 역경에 끝내 굴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그려낸 차이까지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창비 <사양>의 알찬 구성이 빛나는 지점이다.
다자이 오사무 소설의 새로운 가치를 끄집어내는 선집
집으로 돌아가는 이 시골길을 매일같이 보니 너무나 익숙해서 얼마나 조용한 시골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저 나무, 강, 밭, 그것뿐이니까. 오늘은 한번 다른 곳에서 처음으로 이 시골을 찾아온 사람 흉내를 내봐야지. 난, 음, 칸다 근처에 있는 게따 가겟집 딸로, 난생처음 교외의 땅을 밟는 거다. 그렇다면 이 시골은 도대체 어떻게 보일까. 멋진 생각, 가련한 생각. 나는 정색하고 일부러 과장되게 두리번거린다.(<여학생>, 40쪽)
제 가슴에 혁명의 무지개를 띄워준 건 당신이에요. 살아갈 목표를 준 것도 당신이에요.
저는 당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태어날 아이에게도 당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할 생각입니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며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부디 당신도 당신의 투쟁을 계속해주세요.(<사양>, 3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