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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김선(영화감독) 2015-08-14

반전영화, 그 핵폭탄 같은 충격감전은

<식스 센스>

2004년 노무현 정권이 기어이 파병 결정을 내렸다. 많은 시민이 반전시위를 했고 영화인들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독립영화인들은 시민과 함께 반전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 독립영화협회 사무실에서 시민들과의 첫 회의를 열었는데, 그중 한분의 발언이 큰 파장을 낳고 말았다. 그분 왈, “<식스 센스>를 능가하는 반전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헉. 모두가 경악했다. 회의에 참가했던 지인의 말에 따르면 “거대한 돌덩어리가 뒤통수를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 반전(anti-war)의 기운을 상쇄시킬 만큼 당시의 반전(twist)의 인기는 대단했고, 그 인기는 아예 반전영화라는 장르를 만들 만큼 하나의 현상이었던 것이다.

반전은 영어로 twist라고 한다. 뭘 일그러뜨리냐고? 바로 플롯의 방향을 일그러뜨린다. 영화 내내 캐릭터들과 상황, 분위기로 잘 축적하던 텐션을 단 한번의 twist로 방향 선회하며 새로운 텐션을 핵폭탄처럼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너무나 유명한 <식스 센스>의 반전은 “귀신에게 시달리는 소년을 돌봐준 주인공이 실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귀신에게 시달리는 소년에게 텐션이 집중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주인공에게 텐션의 방향이 역행(twist)된다. 물론 귀신의 미스터리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주인공-귀신 텐션은 아주 느닷없는 건 아니다. 다만 텐션의 대상이 급격히 옮겨가는 그 속도감이 느닷없다. 다시 말해 반전은 텐션의 방향이 바뀌는 것 자체라기보단 방향이 바뀌는 가속도다.

<엔젤 하트>

반전의 부작용과 순작용

반전을 크게 하기 위해선, 즉 가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선 곧 무너질 텐션을 아주 오랫동안 축적하는 게 좋다. 오랫동안 반대방향으로 가야만 반전에 의해 제 방향으로 갈 때 가속도가 붙을 테니까. 그래서 많은 반전영화들이 반전을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한다. <식스 센스>가 그랬고, 그보다 몇년 선배인 <유주얼 서스펙트>가 그랬고, 반전 열풍에 힘입어 만들어진 거의 모든 반전영화들- <아이덴티티> <프라이멀 피어> <디 아더스> <올드보이>가 그랬다. 또한 이 가속도를 즐기기 위해선 후반부의 twist의 실체를 모르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spolier라는 신종용어가 만들어지며 반전의 즐거움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아직 spoiler라는 개념이 전무한 1996년,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앞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려고 줄 선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스포일한 일화는 유명하다. 아주 극악무도한 놈이다.)

이처럼 반전의 신격화가 일어나면서 반전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생겨났다. 반전이 무슨 영화의 본질인 것처럼 홍보되고 또 그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반전의 부작용에 가장 피해를 입은 분은 반전의 트렌드화를 개시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었다. <식스 센스>의 성공 이후 샤말란 감독은 “신나서” 반전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언브레이커블> <싸인> <빌리지>의 반전은 그리 엔터테이닝하지 못했다. 외려 반전의 부작용- 작동하지 않았을 때 오는 재미없음, 배신감- 만 잔뜩 시전했을 뿐이다.

반전의 순작용은 오히려 고전들에서 찾을 수 있다. 하긴 반전의 신격화 이전의 고전들은 반전이 엔터테인먼트의 전부가 아니었기에, 즉 반전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부작용이 날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조지 로이 힐 감독의 1973년작 <스팅>은 클라이맥스를 그 유명한 죽은 척 반전으로 장식했지만, 그 누구도 반전영화로 기억하지 않는다. <스팅>은 로버트 레드퍼드와 폴 뉴먼의 환상 케미와 도박꾼들의 유쾌 통쾌한 속임수로 관객을 즐겁게 했고, 반전은 외려 덤이었을 뿐이다. 앨런 파커의 1987년작 <엔젤 하트>는 어떠한가. 너무나도 패륜적이고 경악스러운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지만, 그래서 극장 개봉 당시 자막으로 “주인공 엔젤은 실은… 였다”고 해명해야 했을 정도로 급가속도를 자랑하는 영화지만, <엔젤 하트>의 엔터테인먼트는 반전에 있지 않다. 미키 루크의 면바지와 후까시, 그리고 부두교의 불길한 의식들, 악마가 질문해대는 그 사악한 미스터리함이 영화의 “다크한”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이다. (<엔젤 하트>의 충격적인 반전영화야말로 스포일되면 안 되기에 대충 적었다. 안 보신 분들은 꼭 한번 보시라. 누가 악마이고 누가 천사인지 잘 구분하면서… 홀홀홀….)

<조디악>

<스팅>이나 <엔젤 하트>의 반전이 순작용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당연히도 반전이 영화의 주제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스팅>은 반전으로 겜블링의 궁극을 보여준 셈이고, <엔젤 하트>는 반전으로 미스터리의 궁극을 보여준 셈이다. (아휴 궁금해 궁금해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또 궁금해.) 그리고 주제와 반전이 미친 듯이 부합하며 극의 텐션도 올려버리고 심지어 작가의 주제의식마저 핵폭탄처럼 투하시킨 영화로 1992년작<크라잉 게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개봉 당시 충격적인 반전으로 홍보되었지만 정작 극장과 비디오에선 그 충격적인 반전이 모자이크 처리된 상태로 공개됐던, 한국에 와서 고생 많이 한 퀴어-반제국주의-정치-스릴러-아트영화 <크라잉 게임>. 영화의 반전은 간단히 말해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이지롱”이다. 물론 트렌드화된 “내가 귀신이지롱” 혹은 “내가 살인범이지롱” 정도의 충격감은 아니다. 하지만 <크라잉 게임>의 “남자-여자 twist”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제국주의가 남-녀를 구분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제의식을 핵폭탄처럼 투하시키는 데 일조하고, 그 폭발력은 <식스 센스>의 “귀여운”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한번 들어보자. 보이 조지의 <크라잉 게임>을. 둥 둥 둥 둥둥둥둥 둥둥둥둥 아이 노우 올 데어 이즈 투 노우 어바웃 더 크라잉 게임… 아흐흐흐 내 안의 여성성. 네 안의 남성성….)

하지만 반전의 가장 큰 폭발은 따로 있다. 주제와 부합하는 것보다 더 큰 폭발이 뭐가 있냐고? 바로 안 알려주는 것이다. “남자게? 여자게?” 혹은 “귀신이게? 사람이게?” 혹은 “천사게? 악마게?” 등의 질문을 영화 내내 해놓고 결국엔 안 알려주는 영화들, 바로 ‘안 알랴줌’ 영화들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당연히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다. 누가 살인범이냐는 질문으로 영화 내내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하더니 막판에 가서는 “안 알려주지롱” 하면서 영화를 끝내는 패기. 그렇다고 짜증을 내거나 환불을 요구하는 관객은 없다. “답 없음”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주제가 이토록 추상적이기 때문에 영화가 무거울 만도 한데 <살인의 추억>은 유머스러운 캐릭터들과 긴장 넘치는 수사극으로 충분히 엔터테이닝했거니와 무엇보다 “시대의 아픔” 분위기를 영화 내내 잘 축적하면서 “살인자는 시대 자체이지롱”이란 주제 문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또 다른 예로는 역시 안 알랴줌 영화의 대표작 <조디악>이다. 우리나라에선 해괴하게도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카피로 데이비드 핀처 감독에게 굴욕(!)을 선사했던 바로 그 작품이다. <살인의 추억>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는 영화지만 <조디악>은 “시대의 아픔”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다. 롱테이크도 많고 컷들도 거의 만연체다. 무엇보다 시간경과가 10년이 넘을 정도로 세팅 자체가 롱텀이다. 아주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려고 작정했고 또 성공한다. 그리고 그 지루함으로 데이비드 핀처가 파고드는 건 시대의 부조리함을 넘어서 “시간의” 지리멸렬함이다. 살인은 계속되고 수사도 계속되고 또 시간은 흘러간다. 주인공도 늙어가고 살인자도 늙어가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잊혀진다. 그리하여 안 알려줌이 외려 놀랍지 않다. 지리멸렬의 본질은 그 원인을 아무도 모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조디악>은 <살인의 추억>보다 좀더 형이상학적인 주제문장으로 요약해도 될 것 같다. “살인자는 시대다”를 넘어서 “살인자는 시간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데이비드 핀처의 다음 작품은 시간을 고찰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반전 대신 리듬감

이제 반전영화는 한 장르로 분류될 만큼 많고 다양하다. 하지만 반전을 위한 반전의 반전에 의한 반전영화는 더이상 엔터테이닝하지 못하다. 이유는 반전의 충격감이 역치에 다다랐기 때문이고, 또 반전은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당연히도 리듬감이다. 영화는 음악이며 감독은 지휘자고 배우들은 플레이어며 컷과 시퀀스는 모두 음표다. 좋은 리듬은 꾀를 부리지 않는다. 갑자기 악기를 바꾸거나 템포를 바꾸는 건 한계가 있다. 관객을 궁극적으로 즐겁게 하는 건 차곡차곡 축적된 음표들이 만들어내는 “농밀한” 리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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