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골’자도 잘 모르지만 곧잘 골프 프로를 보곤 한다. 골프 전문 채널이 여럿이니 작정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재방송이든 생방송이든 하루 종일 골프 치는 남과 여를 골라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클래식 음악 듣듯 골프 경기를 보게 된 건 필드 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적막, 그 ‘침묵’이란 먹먹함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후부터다. 공이 홀 안으로 완벽하게 빨려들기까지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이 어떤 힘인지 한 선수가 품어내 보이는 어떤 자세로부터 확실히 알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 화두로 자주 쓰이는 테마이니 그 침묵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쏟아져왔다.
그러나 막 짜낸 젖소의 젖처럼 그 침묵이 바로 구현되는, 그 침묵의 생짜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터. 골프를 대표로 예를 들긴 했지만 인간들의 스포츠야말로 그 침묵의 다양한 민낯을 엿보게 해주는, 무수히 많은 그 침묵들의 바로미터가 아닐는지.
다이빙보드 위에 한 선수가 몹시도 신중히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동작의 기술과 미를 겨루는 다이빙 경기에서 보다 아름답게 입수하기 위해서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테니스 코트에서 팽팽히 맞선 두 선수 가운데 한 선수가 라켓을 힘껏 휘둘러 서브를 넣고 있다. 상대로부터 넘어오는 공을 보다 강하게 되받아치기 위해 한 선수에게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격이나 양궁처럼 분명한 표적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의 경우 침묵이 전부라서 덤덤하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승부차기 시 골키퍼와 마주선 스트라이커의 침묵에는 안쓰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을 침묵의 전제는 그러다 어느 날 저마다 제 안에 잘 싸매둔 슬픔의 감정까지 죄다 꺼내 풀게 만든다. 울게 만든다.
산다는 일이 그렇지, 어차피 죽어가는 일이지. 이 빤한 사실을 제대로 맞닥뜨리면 사는 데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걸 너나 할 것 없이 아주 잘 아는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그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한 채 말에게 애걸복걸이다. 통화만 간단히 그렇게 시작했던 전화기를 ‘가짜 팔’이 아닌 ‘진짜 팔’처럼 제 귀에 매단 것도 우리다. 들리지는 않으나 보여지는 말로 말의 알을 무수히 낳고 있는 말의 산란 장소 SNS를 만든 것 또한 우리다.
어젯밤에 열 시간 넘게 잤는데도 잔 것 같지가 않아요. 후배가 벌게진 눈으로 내게 답답함을 호소했을 때 나는 더 뻘게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있지, 잠의 그 침묵을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아. 나는 잠도 밤도 다 까먹었어.
수면제가 떨어져 병원에 전화를 하니 일주일 전부터 예약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간호사는 내주부터 시작되는 병원 여름휴가 전에 약을 처방받으려는 환자들이 몰린 탓이라 했다. 몸은 안 쓰고 말만 쓰니 이렇게들 아픈 걸까. 침묵이고 나발이고 나는 일단 텔레비전부터 꺼야 살겠다.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