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집밥이 뭐 어쨌다고?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은희(일러스트레이션) 2015-08-04

내게 ‘집밥’은 아직도 폭력적이고 서글픈 이미지다. 순전히 엄마 당신 때문이리라. 대부분 시골에서 그랬듯 엄마는 남자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논밭에서 일하다가 밥을 지었다. 돌이 씹히는 날엔 집안 어른들이 밥상을 엎었다. 이렇게 애면글면 밥을 지어도 여자는 남자와 겸상을 하지 못했다. 겸상은 ‘쌍놈들이나 할 짓’. 할아버지 밥상, 남자들 밥상, 그리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밥을 먹었다. 집에서 겸상을 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밥 먹는 시간은 내게 지옥 같았다. 집안의 종손인 까닭에 밥 먹는 시간에 모든 예의범절을 점검받아야 했다. 밥 먹다 말고 할아버지한테 귀싸대기를 맞는 것도 다반사였다. 18살 때였던가, 머리 굵어지고 이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반기를 들었던 게. 일부러 부엌에서 밥을 먹었다. 집안 어른들은 잔소리를 퍼붓고 경멸했지만, 그냥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아마도 이렇게 내가 되바라지게 살게 된 건 엄마의 저 서러운 부엌 때문이었으리라.

엄마는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술회하곤 한다. 시집와서 밥 짓고 살아온 게 그렇게 고통스러웠다고, 지금에서야 좀 평화로워졌다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다 분가해서 ‘밥을 지어서 올려야 할’ 대상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지어주고픈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이에 대한 엄마의 대꾸는 정곡을 찌른다. “명절에 시집간 딸이 오면 참 반갑지. 근데 그 딸이 가면 더 반갑지.”

그런 까닭에 ‘엄마의 손맛’이네 ‘미각의 전통’ 같은 소리를 들으면 실소가 먼저 나온다. ‘미각의 전통’이라는 건 ‘잉여’의 산물이다. 왕과 양반처럼 먹거리를 ‘식도락’으로 추상화할 수 있는 계급과 달리 대다수 가난한 인민에게 밥은 생존, 그 자체였다. 서민들 삶에 있어 엄마에게서 딸과 며느리에게 전승된 조리법이라는 건 ‘부엌’에 감금된 가부장제하의 여성들의 숙련 노동을 상징하는 것이지 뭐 대단한 비기의 전승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집밥’은 외식 문화가 생기면서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에 불과하다. 전근대 공통체가 붕괴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밥 먹는 공간이 집 밖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식 비율이 전체 식사의 40%를 넘고, 1인 가구가 막 25%를 넘어가는 시대가 됐다. 섭생양식, 가족의 구조, 심지어 성별분업의 형태도 달라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은 가장 길되 요리하는 시간은 가장 적은, 이 외설적인 나라에서 집밥을 여전히 ‘엄마와 아내가 해주는 밥’으로 여기는 시대착오적인 낭만고양이들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집밥은 그냥 집에서 해먹는 밥을 의미할 뿐이다. 연령도, 성별도 다양해졌다. 오히려 이 혹독한 신자유주의 왕국에서 집밥에 대해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건 ‘요리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함께 밥을 나눠먹을 어떤 관계의 온도일 것이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건 요리와 삶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엄마한테 따뜻하게 집밥 지어서 올려봐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