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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다노]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
장영엽 2015-07-28

<러브 앤 머시> 폴 다노

<러브 앤 머시>

영화 <유스>(2015) <러브 앤 머시>(2014) <노예 12년>(2013) <프리즈너스>(2013) <루퍼>(2012) <믹의 지름길>(2010) <나잇 & 데이>(2010)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미스 리틀 선샤인>(2006) <잭과 로즈의 발라드>(2005) <테이킹 라이브스>(2004) <L.I.E>(2001) <더 뉴커머스>(2000)

“우린 프로야. 알 만한 뮤지션들과 다 해봤어. 시내트라, 딘 마틴, 엘비스, 필 스펙터, 샘 쿡. 전부 다! (중략) 그런데… 너는…. 이것만 알아둬. 넌 천부적이야.” 새 음반 작업에 마음이 심란했던 20대 캘리포니아 청년은,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과 작업해본 세션맨(그는 레킹크루의 드러머 할 블레인이다)의 칭찬을 듣고 그제야 수줍게 미소짓는다. 그가 작업하던 앨범은 60년대의 전설적인 명반으로 손꼽히는 ≪Pet Sounds≫이고, 그의 정체는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다. 지금이야 어떤 곡에 접시 닦는 소리가 함께 녹음되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스튜디오에 개를 데리고 나타나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녹음해 음반에 넣는다는 건 파격에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스물세살이었던 브라이언 윌슨은 그걸 해냈다.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을 쥐락펴락하며 자신이 원하는 음악의 정수를 뽑아낼 때까지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는 남자. <러브 앤 머시>가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브라이언 윌슨은 작은 음반 녹음 부스 왕국의 완벽한 지배자다.

미국 배우 폴 다노가 이 앳되고 재기 넘치는 음악 천재를 연기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둥글둥글한 얼굴형과 굳건한 턱, 의뭉스럽게 다문 입술. 폴 다노의 외모는 마치 60년대 비치 보이스 앨범 재킷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것처럼 젊은 시절의 브라이언 윌슨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가 한때 밴드 ‘무크’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였다는 점도 <러브 앤 머시>의 출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브라이언 윌슨의 접점이 그뿐만은 아니다. 폴 다노의 전작들을 돌아보자. 조종사가 되기까지 묵언수행을 하겠다며 소란스러운 가족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드웨인, 산전수전 다 겪은 석유 시추업자 앞에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높은 액수의 돈을 부르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광기어린 목사 일라이, 솔로몬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노예 12년>의 티비츠 등 그는 누가 뭐라 하든 우직하고 때로는 섬뜩하게 자신만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인물을 연기했을 때 가장 빛났다. <러브 앤 머시>에서 폴 다노가 연기하는 브라이언 윌슨 또한 그 인물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Pet Sounds≫ 앨범의 이질적인 사운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비치 보이스 멤버들에게 윌슨은 말한다. “그건 구닥다리야. (중략) 언제까지 여름 타령, 흥 타령만 할 거야?” 약쟁이 음악, 처지는 음악, 히트하지 못할 음악.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좋은 말을 듣지 못한다 해도 혁신을 위해서라면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그러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던 <러브 앤 머시>의 불운한 음악 천재를 폴 다노는 담담하고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 영화를 본 노년의 브라이언 윌슨이 그의 연기를 보고 “좋았다”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들 각자의 브라이언 윌슨을 찾아달라.” <러브 앤 머시>의 감독 빌 포래드는 20대와 40대의 윌슨을 연기하는 폴 다노와 존 쿠색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실존 인물을 꼭 빼닮은 누군가를 연기하기보다 배우 나름의 해석으로 한 인물의 특정한 시기를 만들어나가길 바랐던 까닭이다. 감독의 이러한 주문에 응하는 폴 다노만의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영화를 준비하는 몇달간 브라이언 윌슨을 만나지 않는 것. 둘째, 살을 찌우는 것. 그는 “자신만의 해석과 상상을 동원해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고 싶었던” 마음에 일부러 윌슨을 만나지 않았고, 1973년부터 2년간 샤워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은둔자 생활을 했던 윌슨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몸무게를 13kg나 늘려야 했다고 말한다. “윌슨의 삶에 대해 알아가며 가장 슬펐던 점은 브라이언을 도와줄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틀스에겐 조지 마틴(비틀스의 다섯 번째 멤버라고 불리는, 그들 대부분의 음반을 제작한 프로듀서)이 있었다. 그가 ‘얘들아, 우리 미친 짓 한번 해볼까’라고 하면 멤버들은 ‘제기랄, 좋아요’라고 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언 윌슨이 뭔가 해보자고 하면 모두가 ‘안 된다’고만 했다.” 자신의 시도가 끊임없이 벽에 부딪히고 거부당할 때의 서러움. 폴 다노가 주목했던 건 20대의 브라이언 윌슨이 끊임없이 느껴야 했던 상실감과 상처였다. 누군가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내색하진 않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러브 앤 머시> 속 폴 다노의 유약한 표정은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러브 앤 머시>를 촬영하기 이전, 그는 오랫동안 저예산 인디영화와 작가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건 작품을 고르는 그의 안목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데어 윌 비 블러드>)과 켈리 레이차트(<믹의 지름길>), 드니 빌뇌브(<프리즈너스>)와 스티브 매퀸(<노예 12년>). 이건 결코 허투루 선택하는 자의 커리어가 아니다. 동세대 남자배우들이(폴 다노는 현재 30살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영화를 기웃거리고 있을 때, 폴 다노는 지금 현재 영미권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감독들과 작업하는 편을 선택했다. 지난 2013년 <인디와이어>는 ‘왜 폴 다노는 쳇바퀴를 도는 무비스타가 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명성보다는 실력을 좇는 이 보기 드문 젊은 배우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앞날을 밝게 점치는 건 평단뿐만이 아니다. <잭과 로즈의 발라드>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폴 다노와 호흡을 맞춘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지금 현존하는 젊은 남자배우들 가운데서 가장 전도유망한 배우”로 폴 다노의 이름을 호명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데어 윌 비 블러드> 현장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기운에 눌려 상대역을 맡은 켈 오닐이라는 배우가 촬영 도중 하차하고, 급박하게 투입된 폴 다노가 단 이틀 만에 일라이로 완벽하게 분해 현장의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기에 관해서라면 거의 수도사적인 엄격함으로 유명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극찬은 폴 다노의 존재감을 더욱 빛나게 하는 데 일조했지만, 정작 그는 흥분도 호들갑도 떨지 않은 채 다음 작품을 향해 묵묵히 전진할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의뭉스러움이 배우 폴 다노의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같은 연기 괴물을 상대로 결코 자신을 굽히지 않는 대담함, 브라이언 윌슨이라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그림자에 매몰되기보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집요함.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알기 위해 그저 도전하고, 이해해나가는 것”이라고 믿는 폴 다노는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중심을 지녔다. 그런 그의 차기작은 파울로 소렌티노의 <유스>다. 이 이탈리아 거장과 마이클 케인, 하비 케이틀이라는 영미권 베테랑 배우들과의 협업을 거치며 폴 다노는 또 어떤 성장을 경험했을까.

<데어 윌 비 블러드>

거짓 선지자의 파멸

“앳된 얼굴의 다노에게 찬사를…. 교활하고 예측불허의 흉폭함을 지닌, 대니얼 플레인뷰의 가장 무시무시한 적.”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폴 다노를 두고, <롤링 스톤>의 평론가 피터 트래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러브 앤 머시>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지만, 아직까지 폴 다노의 최고작은 <데어 윌 비 블러드>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그는 석유 시추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를 고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폴, 그리고 그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자 광기의 소년 목사 일라이로 분해 1인2역의 연기를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장면은 대니얼의 꾐에 넘어간 일라이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어쩔 수 없이 고백하는 대목. 한 마을을 지배했던 거짓 선지자의 파멸이 폴 다노의 얼굴을 통해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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