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사내가 아니야. 여자야.” <7인의 여포로>(1965)에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을 위반해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만희 감독은 제작자 호현찬과 김지헌 시나리오작가에게 휴가 나온 남자 모범수 얘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들은 김지헌 작가는 이만희 감독에게 남성을 여성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는 “여자가 죄 짓고 형무소에 가서 모범수로 휴가를 나온다. 형무소까지 들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애증이 쌓였을 것이다. 그때 신성일을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면서 온기를 되찾는다”는 아이디어를 건넸고, 3주 만에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대사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갔던 당시 한국 시나리오와 달리 영상으로 이야기를 구축했던 <만추>(1966)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만추>를 썼던 김지헌 시나리오작가가 지난 7월15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가 1956년 시인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8년 <종점에 피는 미소>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됐다. 그때 썼던 필명이 김지헌이다. 본명은 김최연.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사 자료 <한국영화를 말한다>에 실린 김지헌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당시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심사위원이었던 오영진 선생의 제자였던 까닭에 “제자라는 덕을 볼 생각이 없고, 또 오영진 선생한테 심적 부담을 줄 것 같아 김지헌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해 그는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을 각색하면서 충무로에 데뷔했다. 첫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빈병 장사를 하는 청춘들을 그린 <젊은 표정>(1960)이었다. 흥행은 실패했지만 부일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시마 나기사가 <시나리오>라는 잡지에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 일본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그때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이 나오면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바람이 불었다. 우리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그래서 <젊은 표정>에서 로케이션 촬영이 많다. 황량한 들판에서 병을 주워가지고 하는데 그거 좋았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태양은 다시 뜬다>(감독 유현목, 1966), <만추>(감독 이만희, 1966), <육체의 약속>(감독 김기영, 1975) 등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였다. 김수용 감독은 “그의 시나리오는 설명적이지 않았다. 지문과 대사가 절제되어 있어 문학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늘 모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은 작가였지만, 가정에서는 “조용하고 차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김지헌 작가의 딸인 김정아 CJ엔터테인먼트 전 대표는 “아버지가 술을 전혀 못 드신다. 대신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담배꽁초가 가득 있는 재떨이 서너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다”며 “늘 밤에 글을 쓰셔서 오빠(김정상 전 시네마서비스 대표, 현재 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회장)와 학교갈 때 보면 아버지는 늘 주무시고 계셨다”고 떠올렸다.
그가 쓴 많은 작품 중에서 스스로 애착을 많이 가졌던 작품은 단연 <만추>였다고 한다. “또 영화화되지 않았던 시나리오인 <망향>과 <돌이의 전쟁>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라실 정도로 애착이 많으셨다”는 게 김정아 CJ엔터테인먼트 전 대표의 얘기다. <한국영화를 말한다>에서 그는 후배 영화인들을 위한 애정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얼마나 높은 감성을 가졌는가로 그 작가의 우열이 가려진다. 지식 가지고는 안 돼. 시시콜콜 이야기를 만드는 건 소용없어. 영화는 초점이 있어야 한다고. 작가의 고뇌 속에서만이 진정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지.”
* 참고자료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사 자료, 미출간) (한국영상자료원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