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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영화의 도시로서 부산이 한 단계 더 성장하도록”
김성훈 사진 백종헌 2015-07-29

부산일보 영화연구소 김인수 초대 소장

“조직력, 기획력, 추진력이 뛰어나고, 영화 제작과 관련해 밑바닥 경험이 많아 위기 대처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강우석 감독의 측근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한번 얘기하면 끝이 없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이 쓴 책 <승부사 강우석>은 김인수를 그렇게 소개했다. 그건 시네마서비스의 전신인 강우석 프로덕션에서 창립작 <투캅스>(1993)의 현장 프로듀서로 시작해 2005년 7월21일 시네마서비스 사장까지 두루 겪은 ‘제작자 김인수’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2008년 시네마서비스 대표직을 사임한 뒤 김인수는 2011년 8월 기반조성국장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합류한 뒤 2013년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올해 초 영진위를 떠났다. 조종국 <씨네21> 편집위원은 그를 두고 “영화 산업과 정책 등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사고와 발상이 합리적이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이 장점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건 ‘행정가 김인수’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그런 그가 7월1일 출범한 부산일보 영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다. 그 일 때문에 서울과 부산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는 김인수 소장을 서울에서 만나 영화연구소가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물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느라 정신이 없겠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으로 내려간다.

-부산일보 영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다. 어떻게 제안을 받았나.

=당시 부산일보 영화 담당이었던 이호진 부소장과 이런 얘기를 나눈 적 있다. 지난해 영화제가 끝난 뒤 무척 시끄러웠는데, 중재 역할을 하는 곳이 없으니 부산영화제, 부산영상위원회, 영화학교, 부산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협의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3년이라는 사무국장 임기 때문에 1년 반 만에 부산 생활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아 다른 역할이 있다면 부산에 좀더 남고 싶었던 차였다. 그 아이디어가 부산일보 안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는지 빠르게 진행돼 지난 3월 구체적으로 한번 해보자고 얘기가 됐다.

-씨네2000 이춘연 대표나 강우석 감독 등 주변 사람들은 영화연구소에 합류했다고 하니 뭐라고 하던가.

=영화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구체적으로 알려진 건 아직 없다. 부산 지역은 다 알고 있다. 영진위가 부산에 내려왔지만 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 역할을 하겠다고 하니 서병수 부산시장이나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오석근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 등 만나는 사람들마다 “부산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좋아해줬다. 특히 부산시는 영화제와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되니까. 발족식이나 개소식을 따로 열진 않고, 8월 말 부산 지역에 있는 영화 단체와 부산시가 참여하는 창립 포럼을 열려고 한다.

-포럼 형식의 협의체라는 점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나. 언론사가 영화연구소를 설립하는 건 단지 수익을 올리겠다는 목적만은 아닐 텐데.

=예전에 부산발전연구원이 부산이 자기 색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낼 때 자문을 해준 적이 있다. 부산에서 영화 촬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영화인들은 서울에서 살고 서울에서 비즈니스를 한다. 제작사를 부산에 억지로 내려오라고 해도 안 된다. 부산만이 할 수 있는 걸 찾는 게 중요하다. LA의 ‘시네 기어 엑스포’ 같은 영화 장비 전시회를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한 것도 그래서다.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열리는 부일 영화상도 내년부터는 영화연구소에서 맡는 게 어떠냐는 얘기도 나오고. 지난 3월 센텀시티에 출범한 창조경제혁신센터와도 무언가를 함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작지만, 의미와 명분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한다.

-8월에 열리는 포럼의 주제는 정해졌나.

=정확하게 나온 건 없다. 영화의 도시로서 부산이 한 스텝 더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지, 부산의 영화 관련 단체들과 시가 한자리에 모여 이 고민을 한 적은 없지 않나. 포럼의 첫 번째 주제는 아마도 영화연구소가 만들어진 취지와 같지 않을까 싶다.

-영진위와 관련한 질문도 드리고 싶다. 영진위를 떠나는 과정에서 섭섭한 마음은 없었나.

=사무국장 임기가 3년인데 처음에 기반조성국장으로 들어가 사무국장이 된 까닭에 사무국장으로서 일을 한 게 임기의 절반도 채 안 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지난해 하반기에 준비했던 여러 사업들을 실행하지 못하고, 여러 이유 때문에 신임 위원장 인선이 늦어지게 된 것도 아쉽고.

-사무국장을 그만둔 건 윗선에서 내린 지시라는 말도 많았다.

=어디까지나 신임 위원장의 권한이다. 사무국장은 위원장이 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것이다. 직원들에게도 그건 위원장의 권한이니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임기는 다 채웠다. 떠날 때는 떠나야 한다.

-기반조성국장과 사무국장으로 있었던 지난 3년 동안 영진위의 부산 이전과 남양주종합촬영소 매각 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업을 맡았다. 자평을 하자면.

=자평이든 타인의 평이든 만족할 만한 점수를 주긴 어렵다. 2013년 10월25일 영진위가 부산으로 이전했는데 동서대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매각 문제는 매각이 되지 않아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부산 지역에 스튜디오 숫자가 부족하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글로벌 스튜디오 건립 문제는 전략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나오게 돼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렵다고 본다. 그러한 것들은 김세훈 위원장과 영진위가 길게 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 김의석 전 위원장과의 파트너십은 처음부터 잘못 됐다. 위원장이 사무국장을 임명하는 건 자신의 파트너를 선택하는 거다. 위원장과 사무국장은 잘되든 못되든 함께 가는 러닝 메이트이다. 그런데 기반조성국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원래 없던 자리인데, 당시 김도선 사무국장이 있어 새로 만들어진 자리다. 내가 아닌 누가 됐든 기반조성국장과 사무국장이 영진위의 안살림을 맡는 건 사무국장의 역할이 둘로 쪼개진다는 점에서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산 시대의 과도기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비판은 달게 받고, 수용할 건 수용하고, 왜 그렇게 됐나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위원장과 사무국장 체제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되고.

-직접 겪어본 영진위는 어떤 조직인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다. 영화진흥공사에서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질곡들을 거쳐왔기에 그만큼 조직 시스템이 진화됐고, 직원들의 노하우가 많은 게 장점이다. 반면 영화라는 분야와 국회나 행정부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어야 하는데, 문화체육관광부라는 주무 부처가 있다 보니 정치적으로 항상 흔들린다는 게 단점이다. 경영적 관점에서 영진위는 공공 기관이기에 돈을 버는 조직이 아닌 돈을 잘 쓰는 조직이어야 한다. 계약직까지 합쳐 100명이 넘는 조직이 1년에 쓰는 사업비 대비 경상경비가 어느 정도인가 따졌을 때 영진위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조직이다. 그 문제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눴다. 1년 사업비가 약 500억원인데 경상경비는 약 95억원이다. 일반 기업이라면 엄청 비효율적이고, 공공 기관이라는 특성을 십분 고려해도 밸런스가 안 맞다. 이럴 때는 사업비를 최소한 두배 이상 늘리거나 경상경비를 줄여 둘 중 하나를 해결해야 하는데, 공공 기관을 일반 기업처럼 구조 조정하는 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업비를 늘리는 게 맞는데 새 위원장이 오더라도 그런 노력에 별 관심이 없을 거다. 물론 기획재정부를 설득해야 하고,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까닭에 마음처럼 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진위 예산이 주로 전년도에 준비해야 해서 예산 운용 순발력이 많이 떨어진다. 중요한 사업이 있다면 위원장의 권한으로 전체 예산 중 몇 퍼센트는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그래서 첫해는 정해진 예산을 쓰면서 공부하는 기간이고, 다음 해는 구상한 걸 실천하는 기간이고, 3년째가 되면 떠나야 한다. (웃음)

-지난 3년간의 영진위 생활에 대한 소회를 얘기해달라. 2011년 8월 기반조성국장으로 영진위에 합류했던 당시 “영화인들의 신뢰와 행정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인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과제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진 않지만, 영화인 출신인 김의석 위원장과 내가 영진위와 영화인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면서 조희문 체제 때 시끄러웠던 영진위를 안정시켰다고 생각한다. 부산으로 이전하는 과정과 또 전임 위원장의 임기가 끝날 무렵 신임 위원장 인선이 늦어지는 과정에서 문제는 있었지만 영화인들의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고 생각하는데 올해 들어서 그 신뢰가 다시 흔들리는 것 같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 사업’을 비롯한 영진위의 행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동안 영화인들과 소통을 하면서 타협점을 찾아왔는데 그 신뢰가 많이 깨졌다. 안정숙 위원장 시절 영진위원으로 참여했을 때도, 지난해에도 9인 위원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9인 위원회는 정말 의결 기구인가. 9인 위원회는 존속되어야 하는가. 앞으로 좀더 논의해야 할 문제다. 어쨌거나 부산 시대를 연 영진위가 사업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열린 경영으로 변모되는 모습으로 가야 하는데 최근의 사태는 그걸 못한 거다.

-서울대 자원공학과 80학번이다. 대학 시절, 영화패 얄라셩에서 활동한 것으로 안다.

=진해에서 태어나 영화 좋아하는 해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화를 무척 많이 봤다. 5살에 극장에 간 기억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동아리에서 만든 단편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청소년영화제에서 촬영상도 받았다.

-충무로에서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부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와 <감자>(1987) 막바지에 정일성 촬영감독의 팀에 들어갔다. <연산일기>(1987)에서 세컨드 카메라를 맡았고. 당시는 도제 시스템이라 군대 늦게 다녀와 대학 졸업하고 촬영부에 들어간 까닭에 윗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어려 서로 불편해했다. 당시 촬영부에는 대졸 출신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처우도 열악해 그곳에서 나와 SBS 외주 프로덕션에 들어가 일주일에 두번 방영하는 드라마 방송 <제3극장>의 현장 프로듀서로 일했다. 드라마를 끝낸 뒤 1993년 강우석 프로덕션 창립 멤버로 합류해 창립작 <투캅스>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시네마서비스에서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회사를 운영했던 경험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

=강우석 감독과 9년 동안 함께 일했던 그 시간은 나를 성장시키기도, 좌절시키기도 했다. 업계에서 1위를 달리는 회사에서 대표를 하고, 코스닥에 상장되는 과정까지 겪었으니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부사장에서 대표가 되었을 때 제작했던 영화 <왕의 남자>(2005)가 <실미도>(2003)에 이어 두 번째 시네마서비스 천만 영화를 기록했고. 하지만 당시 한국영화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할 정도로 바닥을 칠 때 회사를 운영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 영화를 제외하면 2006년 라인업은 다 까먹었으니. 1천억 매출을 올렸던 회사의 대표로서 자질이 부족한 건가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나중에 보니 한국영화가 많이 힘들었던 때구나 싶었고, 그래서 면피를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업계 안에 있다 보니 태풍이 불 줄 몰랐던 거지. 사람이 참 겸손해지는 계기가 됐다.

-다시 제작으로 현장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글쎄. 제작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많지 않나. 좋은 작품이 있다면 꼭 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지금은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강우석 감독? 강우석 감독이 제작자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헤어졌으니 제작자와 감독으로 다시 만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영화연구소 일을 시작했으니 잘해야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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