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또는 글이란 매체의 특징이자 장점은 독자의 의도대로 진행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1.5배속으로 보면 죄책감이 들지만 책은 빨리 보아도 천천히 보아도, 또는 보다가 잠시 딴생각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런 읽기의 과정이 독서의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미우라 시온의 <마사&겐>은 천천히 읽기에 좋은 책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73살 동갑내기 두 할아버지의 일상을 그린 이 소설에는 독자의 진지한 몰입을 강제하는 어떤 심각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는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도 지극히 가벼운 태도로 그 사건에 접근한다.
여기서 가볍다는 건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 단지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자기 주변의 일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쏟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사와 겐에게는 엄청나게 슬픈 일도 일어나지 않고, 엄청나게 기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쁜 일이 일어나도 심술궂은 말을 굳이 한마디 덧붙이고, 소중한 사람이 떠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라며 조용히 한숨을 한번 내쉬고 넘어간다. 가끔 약간이라도 감정이 고조되려 하면 미우라 시온이 잽싸게 개입해 특유의 짓궂은 태도로 감정을 휙하니 날려버린다. 그러고 나면 결국 소설에 남는 건 마사와 겐의 막연한 낙관, 가벼운 심술, 귀여운 냉소, 그리고 약간의 상념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심각한 분위기를 일관적으로 지양한다. 그렇기에 인물의 행동과 상황의 묘사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슨한 여유가 배어들고, 그 여유는 독자들에게까지 전해진다. 문장은 어렵지 않고 사건은 단순하다. 진지한 사변을 괜히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러니 <마사&겐>은 천천히, 가벼운 마음으로, 종종 주변도 둘러보며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런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며 책을 읽다보면 나와 주인공들의 모습이 살짝 닮았다는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소소한 대리만족의 즐거움까지 안겨주는 매력을 가졌다. 이를테면 아무 일도 없는 무료한 저녁에 불쑥 옆집에 찾아가 같이 밥을 먹는다든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싱거운 농담으로 따뜻한 위로를 받는 모습. 또는 특별한 날에 남들에게 자랑할 새로운 요리법을 열심히 연마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마음의 짧은 휴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분들은 가슴 뭉클한 거대한 감동 같은 건 기대하지 말고 편한 차림에 선풍기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기를(또는 바닥에 눕기를) 추천한다. 모든 독서가 꼭 진지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내 생각엔 말이지….” 겐지로가 빨간 열매로 눈길을 돌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은 사후 세계 같은 데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기억 속이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사부도 집사람도, 다들 내 안으로 들어왔어. 가령 네가 먼저 간다 해도, 내가 죽는 날까지 너는 내 기억 속에 있을 거야.”
겐지로다운 생각이다. 구니마사가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짓는다.(88쪽)
간밤에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넋두리를 늘어놓고 술을 나눠 마시고 함께 곯아떨어질 죽마고우와 젊은 벗이 있다는 것. 구니마사는 그것이 그저 고마웠다.
남편과 아버지로는 낙제일망정 자신도 겐지로나 뎃페나 마미씨에게는 얼마간 쓸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또한 구니마사에게 기대나 희망을 품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딘가에 이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해졌다.(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