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으로 익숙한 김려령 작가의 신작 <트렁크>를 술술 읽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먼저 NM은 ‘새로운 결혼’(New Marriage)의 줄임말로서 비밀 회원들을 대상으로 ‘기간제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팀의 이름이다. 그리고 FW, FH는 ‘필드 와이프’(Field Wife)와 ‘필드 허즈번드’( Field Husband)의 줄임말로서 기간제 결혼에서 아내/남편 역할을 담당하는 맞춤형 결혼기술자를 의미한다.
이 소설 속 세계는 사랑에 기반한 정석적인 결혼의 절차는 피하고 싶지만 결혼 자체는 잠깐씩 누리고 싶은(안정적인 섹스, 성정체성 숨기기, 외로움 방지 등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들이 아내와 남편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곳이다. 그리고 <트렁크>의 주인공 노인지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네 번째 ‘결혼 출장’의 경력을 자랑하는 FW로서, 지금은 인기 작곡가와 ‘재계약’해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게 웬 판타지 속 세계인가 싶지만 가만히 책을 읽다보면 실제 한국에서 이런 서비스가 운영 중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극단적인 설정을 제시하되,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도 별일 없이 지속되는 결혼이나 예비 배우자의 물질적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것 등이 그렇다. 게다가 실제 현실에서도 적지 않은 경우의 결혼이 돈으로 이루어진 계약 관계란 걸 되새겨보면 <트렁크>의 이야기는 그리 파격적인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소설 속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면 이제 남은 건 재미있게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작가는 ‘기간제 결혼 서비스’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제시하지만 여기에만 매달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선보인다. 스토킹, 납치, 감금 등 어두운 소재는 물론, 의외의 로맨틱 코미디적 요소와 흥미진진한 반전까지 집어넣어 한 페이지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곳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트렁크>는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많다.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을 한국의 결혼 세태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읽을 것이고, 또 다른 독자는 시니컬한 멜로드라마로, 아니면 나 같은 독자는 말끔한 표면 뒤에 숨은 어둠의 사회를 그린 범죄물로 읽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읽든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쉽게 확인하는 경험은 아마 공통적으로 겪게 될 것이다. 그만큼 재미있다. 거창한 의미는 책을 다 읽은 다음 천천히 생각해보자.
나는 저 조잡한 신뢰의 떡밥을 덥석 물 생각이 없다
끝난 결혼과 관련한 것들은 없애는 게 후련하다. 나는 기념으로 결혼반지만 간직한다. 회사에서 혼인서약을 맺은 부부에게 주는 반지다. 그외 자잘한 것들, 이를테면 사용했던 슬리퍼나 칫솔 따위 같은 것은 모두 버렸다. 가능하면 이 결혼의 찌꺼기를 모두 버리고 싶었다.(8쪽)
결혼 이후에는 모든 삶이 관여당해. 심지어 국가가 헤어지는 것까지 관여하잖아. 둘이 합의했는데 왜 법원을 가야 하지? 혼인신고처럼 파혼신고하면 안 되나? 그러면 앞다퉈 이혼할 줄 아나봐.(58쪽)
너무 깊은 신뢰는 상대를 잡아당겨 한쪽으로 묶는다. 동등한 위치 따위는 없다. 먹거나 먹힐 뿐이다. 둘 중 누구의 아가리가 더 큰지는 자명하다. 줄까요, 말까요. 나는 저 조잡한 신뢰의 떡밥을 덥석 물 생각이 없다. 고객님, 영원히 나의 등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 떡밥 치우세요.(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