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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른이 된다
송경원 2015-07-23

직유의 기법으로 인생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픽사의 위대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영화, 명가의 부활, 경이로운 창의력 등등. 찬사 일색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부터 호평이 쏟아지며 궁금증을 자아냈던 <인사이드 아웃>은 그간의 격찬이 부끄럽지 않은 완성도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별다른 설명을 할 것도 없다. 보기 드문 창의력과 마법 같은 이야기로 무장한 영화다.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고 한 조각 울림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재밌고 감동적인’이란 행간 사이에서 무언가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디즈니와 합친 뒤에도 여전히 픽사스러운 색깔을 잃지 않고 있는 피트 닥터 감독을 중심으로 <인사이드 아웃>의 눈부신 성공비결을 살펴봤다. 픽사가 다시 돌아왔다.

고백하건대,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를 배웠다. 초기 영화의 아름다움을 느낀 건 고전 속 명장면들이었지만 그 움직임에 처음으로 매혹된 건 <>(2009) 초반 2분짜리 무성 몽타주 시퀀스를 통해서였다. <>의 괴팍한 노인 칼의 젊은 시절을 담은 짧은 영상은 그 자체로 영화가 시간을 압축하는 과정을 증명한 우아한 율동이다. 칼은 앨리와 만나고, 마음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일상을 버티고, 함께 늙어간다. 대사 한마디 없이 10컷 남짓한 화면 안에 한 사람의 생을 담아내는 마술. 이후 펼쳐질 90분의 모험보다 훨씬 농밀하며 간결하고 고요한 표현. 추상적인 언어의 힘을 빌리자면 ‘삶을 그리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스크린에 화면이 비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눈물이 맺혔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은 그 어떤 영화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영화라는 마법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직관과 직유의 세계

그럼에도 <>을 굳이 ‘시네마틱’하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은 건 이 작품이 그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애니메이션답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직유의 세계다. 에둘러 표현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담으면 된다. 대개는 추상적인 이미지와 상태를 어떤 매개물에 빗대어 의인화,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치지만 간혹 다른 말이나 설명을 보탤 필요 없이 그 장면으로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 <>에서 칼이 집에 풍선을 달아서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 그런 순간이다. <>에 매혹된 순간은 초반 2분 남짓한 무성 몽타주였지만 이 영화에 경탄한 장면은 칼이 풍선을 타고 말 그대로 날아갈 때였다. 단지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이 장면의 의미를 제한하는 건 게으르다. 이 직접적인 표현이 설득력을 얻는 건 초반 무성 몽타주 장면이 깔아둔 무게감 덕분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 <>은 관객에게 영화적인 은유와 애니메이션의 직유가 완벽하게 조응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상상과 현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어른과 아이, 그리고 과거와 현재. <인사이드 아웃>으로 6년 만에 돌아온 픽사의 피트 닥터 감독은 데뷔 때부터 꾸준히, 우리가 무의식중에 구분해왔던 두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아왔다.

칼아츠 출신인 피트 닥터 감독은 선배 존 래세터의 조언을 듣고 픽사에 합류했고 곧장 <토이 스토리>(1995)의 스토리감독을 맡으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몬스터 주식회사>(2002)에서 첫 연출을 맡았을 때 주변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30대 감독의 발탁에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보란 듯이 성공을 거뒀고 2009년 <>을 통해 자신이 왜 픽사에 필요한 인물인지 다시금 증명했다. 디즈니와 합병한 지금 피트 닥터만큼 기존 픽사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감독은 드물다. 디즈니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의인화의 세계라면 드림웍스는 안티-디즈니를 기치로 반영웅들의 전복을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픽사는 디즈니가 쳐놓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울타리 저 너머를 바라본다. 흔히 픽사의 작품을 어른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의 원숙미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 그리고 피트 닥터가 항상 추구해왔던 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선이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돌아보고(<토이 스토리>), 장롱 속 괴물을 무서워했던 기억을 되돌아보고(<몬스터 주식회사>),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본다(<>). 너무나 익숙해 잊어버리고 있던 곳에서 발견하는 모험. 어른과 아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곳에서부터 걸음을 내딛는 피트 닥터의 마법은 신작 <인사이드 아웃>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감정, 마음, 상상력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이 창의적인 애니메이션은 ‘그린다’는 단어에 담긴 직관에 충실하다. 흔히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의 전유물로 오해받는 건 단순히 아이들이 많이 관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아이들의 동심, 꿈과 환상의 세계를 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린다’는 표현의 이점을 살려 머릿속에 떠오른 무한한 상상력을 화면으로 옮겨 담는 과정은 아이들이 자신의 상상을 이미지로 투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느끼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피트 닥터 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좀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로 세계를 채운다. 감정 컨트롤 본부에 머무는 기쁨, 슬픔, 두려움, 혐오, 분노 다섯 가지 감정은 무에서 창조된 대표적인 직관과 직유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따로 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그들의 존재와 마음속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마치 초기 무성영화의 움직임에 매혹되듯 지극히 감각적이다.

경계를 건너는 성장의 마법

마음이라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의 모험을 담고 있지만 사건 자체는 소박하다. 미네소타에 살던 11살 소녀 라일리가 갑작스레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오며 겪는 마음속 갈등이 전부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의 메커니즘을 이미지화한 이 작품은 라일리 이외 다른 사람, 심지어 개나 고양이까지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감정을 느끼고 기억을 저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화 속 가장 유쾌한 장면 중 하나는 라일리 이외 다른 이들의 머릿속이 차례대로 선보이는 장면들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몽타주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이드 아웃>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건이 아닌 공간이다. 감정 컨트롤 본부를 시작으로 스노볼 모양의 기억을 담은 구슬의 디자인, 핵심 기억을 통해 라일리의 성격을 규정짓는 하키-우정-가족-솔직-엉뚱의 다섯 가지 섬들, 수백만 구슬들이 저장된 장기 기억 창고, 매일 기억을 청소하는 포게터스들, 꿈을 상영하는 드림 스튜디오, 백일몽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상상의 나라, 여러 생각을 실어나르는 생각의 기차, 개념을 정리하는 추상의 공간, 넓은 협곡 아래 기억 폐기장까지 작품 속 공간들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나 다름없다. 여기에 어떠한 설명도 더 필요치 않다. 심리학, 뇌과학적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 꽤 복잡한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아무 무리 없이 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이유다. 무성영화 몽타주 장면이 그러했듯 공간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감정과 상태가 전달 가능한 것이다. 무언가에 빗대지 않고 곧바로 상상을 표현하는 직관과 직유의 힘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의 본질이며 피트 닥터가 어른과 아이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또 다른 방식이다.

태초에 기쁨이 있었다. 라일리는 기본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아이였기에 이후 생겨난 감정들도 기쁨=행복이라고 생각하며 기쁨을 따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모든 감정의 순간에는 이면이 있음을 알고 있다. 오직 기쁨으로 채워지는 순간은 있을 수 없다. 슬픔은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깊이를 제공한다. 혐오는 자신을 사랑하고 꾸미는 재주를, 두려움은 신중하게 자신을 지키는 태도를, 분노는 행동력을 선물한다. 감정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우리의 기억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채워진다. 그 일련의 과정을 서사로 바꾼 감독의 재주와 창의력이 놀랍다. 피트 닥터의 서사는 대개 두 이질적인 세계의 중간에서부터 출발한다. 11살 소녀 라일리가 주인공으로 선택된 건 라일리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선 미묘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라일리는 일련의 감정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이같은 마음의 성장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에서 풍선으로 집을 띄워 모험을 떠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느꼈던 감동을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영화 말미 수없이 늘어난 라일리의 핵심 기억과 성격의 섬들을 보는 순간 느낄 수 있다. 성장의 결과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애니메이션의 존재 이유와 아름다움을 새삼 되돌아보게 만든다.

성장을 상징하는 또 한명의 중요 캐릭터는 상상 속의 캐릭터 빙봉이다. 코끼리의 코, 고양이의 꼬리, 돌고래 소리가 합쳐진 빙봉은 솜사탕으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친구다. 오직 어린 시절 라일리만이 볼 수 있었던 이 캐릭터는 유쾌하고 해박하며 사랑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상상 속의 친구는 언젠가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빙봉을 본 이는 누구나 각자 어린 시절에 묻어둔 상상 속 친구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마치 <토이 스토리>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 장난감 친구들을 마주했던 것처럼. 피트 닥터의 마지막 마법은 여기에 깃들어 있다. 그는 과거를 추억하되 갇히진 않는다. 대신 빛나던 지난 날들과 어떻게 잘 이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슬픔을 딛고 나아가 또 다른 기쁨을 발견하는 것. 슬픔의 가치를 깨닫는 일의 반복.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라일리를 잘 부탁한다는 빙봉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더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린다. 이 장면은 영화 말미 감정 컨트롤 타워에 생긴 ‘사춘기’ 버튼만큼이나 직접적이다. 피트 닥터 감독은 그렇게 관객 각자의 기억 폐기장을 뒤지고 싶을 만큼 근래 봤던 영화 중 가장 멋진 이별 장면을 관객에게 선물한다. 라일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당신도 그랬다. 우리를 뒤따르는 수많은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A113, 이번에도 찾았나요?

<인사이드 아웃>에 숨겨진 픽사의 인장

픽사는 단편, 장편 작업을 통해 작품 속에 종횡으로 자신들만의 코드를 심어놓기로 유명하다. <인사이드 아웃>에 숨겨진 픽사 특유의 인장들.

<몬스터 주식회사>

<몬스터 주식회사>(2001) 속 A113 / 존 래세터와 피트 닥터가 졸업한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의 클래스룸 번호. 이 번호는 사실 픽사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라일리의 반 번호다. 그외에도 몇번 더 나오니 어디 있는지 찾아볼 것!

<포 더 버즈>

<포 더 버즈>(2000) / 라일리 가족이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가에 단편 <포 더 버즈>에 나오는 네 마리 새가 등장한다.

<라따뚜이>

<라따뚜이>(2007) / 라일리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의 식탁 테이블 위엔 <라따뚜이>의 콜레트가 표지로 실린 쿠킹 매거진이 있다.

<라루나>

<라루나>(2011) / 라일리 교실 뒤에 걸려 있는 단편 <라루나>의 포스터. <토이 스토리> 앤디의 방에 있던 지구본도 교실 한쪽에 놓여 있다.

<룩소 주니어>

<룩소 주니어>(1986), <토이 스토리>(1995) / 픽사의 상징 룩소 볼은 라일리와 상상 속 친구 빙봉이 함께 놀던 회상 신에 등장한다.

<업>

<>(2009) / 라일리의 수많은 기억 구슬 속 추억 중에는 <>의 오프닝 몽타주 신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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