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비행선을 띄우는 일과 지하로 철도를 달리게 하는 일… 인간이 상상하지 않았다면 불가했을,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니 어쩌면 신비롭다 할 수도 있는 그 과정 속 지난한 결과물 가운데 후자인 지하철에 오늘도 나는 오른다. 물론 억만장자는 아니니 앞으로도 우주선을 타고 별들의 침묵 사이사이를 후비고 다닐 가능성은 아마 제로이지 싶다. 만약 돈이 생긴다 해도 나는 하늘이 아닌 땅에 투자했을 터, 어쨌거나 나는 내 발만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저녁 7시 반 무렵인가, 휠체어 고정벨트 함이 있는 지하철 9호선의 한 칸에 서게 되었다. 쿠션은 아니지만 폭신한 등받이가 기둥으로 붙어 있어 가능할 때는 내 등을 기대도 된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순간 이 안내문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뚜껑을 열고 안전벨트를 당겨 휠체어 팔걸이에 걸고 고정하십시오. 사용 후에는 벨트를 원위치시키고 뚜껑을 닫아주십시오.’ 살피가 겹겹 붙게 쪄낸 만두처럼 내 살과 네 살이 붙어가게 생긴 마당에 휠체어가 과연 이 시루 열차 속으로 바퀴를 굴려 들어올 수나 있을까. 휠체어라는 마차를 이 공간에 세우고 저 과정을 행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이 사람들이 제 자리들을 내어주기는 할까. 양보를 한다손 치자면 대체 그들은 어디까지 밀려나야 살 수 있단 말일까. 갈 데가 있기나 할까. 징의 울림을 따라 퍼지는 것도 아니고 치솟는 전세금에 서울의 중심부로부터 서울의 외곽으로 점점 밀려나는 우리에게 어디로 더, 더 가란 비유의 비루함일까.
먹고사는 게 그만큼 어렵고 더럽다는 증거야. 그 치사함을 견디면서 너희들을 키웠어. 쓸쓸하지. 부질없지. 허무하지. 그렇지만 삶이 다 그런 거야. 안 죽는 사람이란 없잖아.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그렇게 왔다 가잖아. 그걸 평생 위안 삼는 거지.
칠순을 넘긴 아빠가 푸념처럼 내뱉던 이 빤한 말들이 확연히 이해되는 공간, 지하철. 서민을 위한 교통수단이라고 소위 나랏일 좀 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떠들어댔으니 그들이 애용해야 개선의 여지가 생길 공간, 지하철. 그 지하철에서 내가 빼먹지 않고 따라 읽는 게 하나 있으니 ‘문화시민이라면 꼭 지켜달라’는 광고 보기다. 그 가운데 남에게 불편을 주는 자세는 ‘안돼요’, 열차 안에서 음식물 섭취는 ‘안돼요’라는 두 문장이 유독 거슬렸다. 직업병이라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으나 맥락상에 ‘안 돼요’라고 띄어 써야 할 부분들이 ‘안돼요’라고 죄다 붙어 있는 탓이다. 비단 이 광고뿐일까. 무수히 많은 공공장소의 안내문이나 광고 문안 속 바로잡아야 할 우리말이 수없이 많음은 익히 경험한 바이거늘, 그 책임자들은 글자가 종이가 되기까지 국어사전이나 국립국어원 사이트를 몇번이나 들락거렸을까. 나 혼자 볼 일기장도 아닌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을까.
어른들로부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종종 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이 말을 삼키곤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낫을 딱 기역 모양으로 놓아두시든가요. 국어는 국어시간에만 배우는 게 아니라 국어를 쓰는 일상에서 언제든 배우는 것이거늘, 왜 우리에게 배움은 늘 수업이라는 형식을 통해라 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나중에, 라고 편의대로 말하지만 과연 그 나중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될지는 미지수가 아닌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 모두는 죽고 없어질 테니 소용을 따지자면 무용이랑 얘기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