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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씨네21> 영화평론상: 호찬과 장그래가 속한 세계의 차이(작품비평 전문)

이용승 <10분>

내부가 훤히 비치는 투명한 유리의 회의실. 중년의 부장이 남직원과 대화중이다. 남직원은 계약 기간이 2달 남은 비정규직 인턴 사원이다. 이것은 곧 그가 취업준비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부장은 남직원에게 사표를 제출한 직원을 대신해 정규직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남직원은 거절한다. 부장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고민할 시간 10분을 준다. 남직원은 망설이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 한다. 이승용 감독의 영화 <10분>은 주인공 호찬(백종환)의 결정을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난다.

<10분>과 함께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작품은 TV드라마 <미생>이다. <미생>과 <10분>의 주인공은 둘 다 비정규직이며 결말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정규직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미생>과 <10분>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답변에 도달한다.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지만 해피엔딩을 맞고 <10분>은 정규직 제안을 받지만 망설이며 고민에 빠진다. 두 작품의 결말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생산적인 작업이 아닐 것이다. 대신 <미생>에서 해피엔딩이 작동하는 방식을 읽어내는 작업이 <10분>의 결말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말에서 호찬이 망설인 이유에 대해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원래 꿈꾸었던 PD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서다. 부장(김종구)이 호찬에게 고민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호찬은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호찬은 이미 영화 전반부의 주요 테마인 꿈과 현실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현실을 택한 자이다. PD시험에 다시 또 낙방했을 때, 마침 팀에 퇴사자가 생겨 정규직 면접을 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면접을 본 뒤 벌써 첫 월급을 타기라도 한 것처럼 가족들 선물을 샀을 때 호찬은 자신에게 더 이상 꿈을 좇을 기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부장의 질문에 답하며 끝을 흐리는 호찬의 목소리는 인턴 면접을 보았을 때 확신에 차서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하던 목소리와 대비된다. 호찬의 확신 없는 목소리는 오히려 그에게 이제는 회사원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음을 방증한다.

만약 처음 정규직 면접을 봤을 때 합격했다면 호찬은 고민 없이 입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안 받은 정규직 자리에는 임원의 딸인 송은혜(이시원)가 들어온다. 호찬은 이후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회사의 현실에 눈뜨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더 이상 꿈과 현실이라는 테마가 아니라, 호찬이 냉혹한 회사생활에 적응하면서 겪게 되는 부침을 다룬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가정, 호찬은 자신 대신 송은혜를 선택한 회사에 배신감을 느껴, 송은혜가 퇴사한 뒤 다시 한 번 정규직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이는 것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 <미생>의 결말을 경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미생>의 결말에서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은 다함께 창업을 시도한다. 창업이라는 결말은 단순히 해피엔딩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미생>은 직장 생리에 대한 극사실적인 묘사와 회사 내 팀 공동체라는 판타지를 결합한 작품이다. 리더십과 포용력을 동시에 갖춘 팀장, 각자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팀원들, 신뢰와 우정에 기반한 팀워크는 모든 직장인이 꿈꾸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설정이다. <미생>이 그토록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직장인들의 유토피아를 지극히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내 정치와 이로 인한 비합리적인 평가 등 회사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판타지는 공존하기 어렵다. 차례대로 오상식 팀장(이성민)이 회사에서 퇴출되고 장그래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 한다. <미생>의 인물들은 팀 공동체라는 판타지를 유지할 회사 밖, 현실 밖 공간으로 퇴장한다. 엔딩의 배경이 서울에서 요르단으로, 표현 양식이 사실주의적인 묘사에서 액션이라는 장르적 묘사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 역시 판타지로 비약하는 결말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판타지인가. 판타지가 감추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결말에서 장그래는 오상식 팀장이 창업한 회사의 정규직이 된다. 직원이 한 명 더 필요하자 이들은 경력직이나 청년인턴을 뽑으려고 한다. 취업의 기회는 또 다른 장그래에게는 열려있지 않다. 이 때 합류하는 사람은 영업3팀의 김동식 대리(김대명)다. 김동식 대리는 자발적 퇴사자라는 점에서 판타지의 상징적 존재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의 퇴사에는 아무런 명분도 복선도 없다. 그는 퇴사를 위해 퇴사한다. 영업3팀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돌아온 것이다. <미생>의 낙관적인 상상력은 판타지를 완성할 때에만 유효하다. <미생>이 연재되는 동안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현실적이고 회의적인 목소리가 지배적이었으며, 실제로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 에피소드는 사실적인 실패로 종결된다. <미생>은 회사 생리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와 직장인 판타지 양쪽 모두에 흠집이 나지 않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처리해낸다. 비정규직인 장그래의 문제는 해결된 적인 없지만 결말에서 (정규직이 된 장그래를 포함해) 모두는 행복하다. <미생>의 판타지는 정규직을 위한 것이다. 이곳에 비정규직을 위한 자리는 없다. 이 지점에서 <미생>은 <10분>과 갈라진다.

<10분>의 중반까지 호찬은 정규직 직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성실한 호찬이 마음에 들었던 부장은 호찬을 사내 산행 모임에 초대한다. 호찬은 등산 전날 어머니에게 "정규직 모임인데 난 특별히 참여하라고 해서. 여긴 이런 게 좋은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후 호찬이 부당하게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했을 때에도 직원들은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직원들은 호찬의 문제를 빌미로 부장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불만을 분출할 뿐 그를 위해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직원들이 선입견을 가졌던 것과 달리 송은혜의 발랄한 성격이 팀에 활기를 불어넣자 이들은 송은혜를 쉽게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호찬이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된 것은 호찬 대신 입사한 송은혜 때문이 아니라 송은혜와 친해진 기존 직원들이 호찬의 문제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생>이 장그래를 일종의 판타지 공간인 스타트업 회사의 정규직으로 포섭함으로써 비정규직 문제를 제거해버렸다면 <10분>은 호찬의 비정규직 문제를 봉합하지 않는 대신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소외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편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10분>은 <미생>과 정반대의 노선을 취한다. <10분>은 친밀해 보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가 실은 얼마나 약한 장력으로 연결된 것인지, 정규직의 친절이 얼마나 쉽게 무관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10분>은 인물들의 연대를 회의하는 영화다.

그런데 <10분>에서 호찬의 고립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즉 술집에서 호찬과 직원들이 싸우는 장면이 아니다. 영화는 직원들이 송은혜와 친해지면서 호찬과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과정을 직접적인 대사나 사건보다는 시각적인 장치를 통해 제시한다. 가령 화면 중앙에서 송은혜와 직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는 장면에서 호찬은 화면 끝 쪽에 뒷모습만 간신히 등장한다. 송은혜 무리와 호찬 사이에는 복사기가 놓여 있다. 복사기는 영화 내내 계약직 인턴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호찬은 고장 난 복사기와 씨름하느라 팀원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못 한다. 호찬이 복사기를 고치는 소리가 이들의 대화를 깨뜨리지만 이내 대화는 다시 이어진다. 이후 송은혜가 사온 컵케익을 나눠먹는 장면에서도 호찬은 공간적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다.

부장과 노조지부장(정희타)이 호찬을 불러내 노조에 호소하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도 유사하다. 대화가 끝난 뒤 테이블에 삼각형을 이루며 앉아있던 세 사람 중 부장과 노조지부장이 떠난 자리에 호찬이 혼자 남아 있다. 이 때 미디엄쇼트로 대화 장면을 보여주던 영상이 부감쇼트 바뀌면서 화면 구석에 혼자 남겨진 호찬의 왜소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잠시 뒤 어두운 표정의 호찬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책상에는 예의 컵케익이 놓여 있다. 사운드가 페이드아웃 되면서 호찬이 두리번거리며 팀원들을 찾는 모습이 정면 쇼트로 나온다. 리버스 쇼트에서 회의실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화기애애하게 컵케익을 먹는 팀원들이 정면쇼트로 보여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호찬의 쇼트와 직원들의 리버스 쇼트가 슬로우 모션으로 반복된다. 영화는 하나의 화면 안에서 호찬과 팀원들의 거리감을 강조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이 더 이상 하나의 화면 안에 담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분리된 화면에서 서로를 응시하기 위해 호찬과 팀원들이 정면을 바라볼 때, 카메라를 매개해야만 시선의 교환이 가능해졌을 때, 호찬과 직원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일련의 장면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개별 인물, 송은혜나 노조지부장과의 갈등이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 무리와 여기에는 섞이지 못 하는 호찬의 거리감이다.

송은혜는 임원발표를 망친 뒤 기별 없이 사표를 내고 사라진다. 송은혜가 퇴사한 뒤 팀원들은 알고 보니 그녀가 그렇게 부자가 아니었다고 수군거린다. 이용승 감독의 단편 <런던유학생 리차드>에서도 주인공의 경쟁자처럼 보였던 리차드가 사실 유학생이 아니라 술집 웨이터였음이 밝혀진다. 정규직을 놓고 경쟁하는 출발선이 다른 경쟁자들, 해외대학 출신자나 임원 자제들은 결말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이용승 감독이 그린 세계에서 송은혜나 리차드는 호찬의 진짜 적이 아니다. <10분>에서 호찬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미생>이 판타지로 봉합한 장그래와 정규직 사이의 거리이다. 호찬은 자신을 배척한 바로 그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그의 망설임은 연대 불가능성을 경험한 자가 취하는 환멸의 제스처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그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은 호찬을 대체할 또 다른 호찬과 장그래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