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에 ‘악화’(惡貨)는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유통되기만 하면 문제가 덜한데, ‘양화’(良貨)를 괴롭히거나 파괴한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개운치 않은 말로 현실을 잊는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경우는 ‘내가’ 더러운 것을 밟았을 때다. 상대를 혼내줌, 비난,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밟아줬다”일 때는 외면할 수 있다. 문제는, 더러움이 ‘나를’ 밟았을 때다. 내가 피해자가 되거나 피해자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을 때는 더러운 기분이 아니라 무서워진다. 그냥 덮을까, 참을까. 분노-정의감, 복수 사이에서 갈등한다.
철학자 사라 러딕의 말대로 비판은 “개입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비판은 그 자체로 선(善)이 된다. 선함의 핵심은 성실성과 끈기. 부정(不/正)에 문제의식을 갖고 바로잡으려면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와 법적 문제는 기본, 인생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실증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해야 한다. 결과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십자가를 메겠는가?
신경숙씨 표절 논란을 보면서 든 생각은, 내가 아는 한, 지식계나 사회운동 분야라면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응준’이 나올 수 없다. 문단이 그나마 도덕적인 것 같다. 대학에서 공무원 사회까지 글을 다루는 모든 분야에서의 대필, 표절, 대역(代譯)은 업무의 일부다. 다 베껴놓고 각주만 달아도 표절이 아니다. 그걸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긴 진중권 교수가 증명한 대로 몇해 전 문대성 선수, 아니 문대성 의원의 박사학위논문은 표절도 아니고 다운로드였으니 의외의 방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내 요지는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말이 통하는 사회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신경숙씨처럼 혐의 당사자가 “노코멘트”로 그쳐도 다행이다. 나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매장하고, 맞고소하고, 사생활을 캐고, ‘자객’을 보내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커뮤니티는 방관한다. 심지어 모 학회는 강간 가해 교수를 위해 탄원서까지 돌렸다. 이런 경우는 위험하니 정의고 뭐고 간에 일단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피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문단은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긴급 토론회까지 마련하는 상식이 남아 있는 분들이시다.
무서워서 피할 경우의 최선은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류하는 것이다. 나는 피해자를 위로하고 만류해야 하는 현실에 지쳤다. 그러니 이번 문단의 대처가 어찌 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은 똥이 아니다. 똥은 더럽지도 무섭지도 않은 유기물이다. 악은 건드렸을 때 본질을 드러낸다. 영화에 나오는 목격자 살해와 법의 협조. 가장 악질은 “너는 깨끗하냐”며 사건의 성격을 상호 이전투구로 변질시키는 경우다. ‘디스토피아로부터.’ 멋진 칼럼명이자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