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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잘생긴 개자식>
이예지 사진 백종헌 2015-06-18

<잘생긴 개자식> 크리스티나 로런 지음 / 김지현 옮김 / 르누아르 펴냄

<잘생긴 개자식>은 영화 <트와일라잇>(2008~11) 시리즈의 팬픽으로, 긴장감 넘치는 오피스 로맨스와 수위를 넘나드는 화끈한 묘사로 인터넷에서 3년간 연재되며 200만 팬덤을 확보한 바 있다. 팬픽이라는 점과 화끈한 수위라는 점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뭇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여성이 성적 욕망의 주체로 전면에 나선다는 것. 서민적이고 평범하다 못해 열등감에 시달리는 여타의 신데렐라 여주인공들과 달리, 여기선 MBA 학위 취득을 앞둔 재원인 클로에 밀스가 주인공이다.

<잘생긴 개자식> 또한 할리퀸 로맨스들이 태생적으로 지닌 계급 차와 신분 상승의 관습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로맨스의 상대인 베넷 라이언은 시카고 최대 광고마케팅회사인 라이언 미디어의 이사로, 패밀리 비즈니스의 든든한 뒷배경과 빼어난 업무 능력, 완벽한 외모를 지닌 남자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여주인공의 태도는 기존과는 사뭇 다르다. 클로에는 욕망에 솔직하여, 대부분의 할리퀸 여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어떻게 내가 감히 이런 대단한 사람과?” 같은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클로에는 완벽한 상사에게 압도당하거나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유혹하고 때때로 거부하며 관계를 주도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커리어에 누가 될까 고심하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인다.

스파크가 튀는 섹스 파트너 관계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으로 거듭나는 플롯도 자연스럽다.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소설이지만 기승전결의 구성이 한권의 장편소설로서 잘 짜여 있다. 클로에와 베넷 두 남녀의 시각으로 번갈아 진행되는 챕터는 글 읽는 재미를 더할뿐더러, 여자뿐 아니라 남자 역시 자신이 푹 빠져 있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등한 연애상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동적인 신데렐라 판타지에 머문 기존의 할리퀸 로맨스와는 달리 이 작품은 노골적인 제목만큼이나 여성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향유하는 주체로서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커리어마저 성공적으로 움켜쥔다. 현 시대 여성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진정한 ‘포르노’다.

나 자신에 대해 회의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노력했어요. 그 모든 걸 위태롭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잘해낼 수 있을 거야, 클로에. 앞으로 남은 몇달 동안 함께 일하고 함께 지내는 거야. 오늘 일은…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볼 수 있지.”

“잘 모르겠어요.”

클로에는 눈을 깜빡이면서 내 뒤쪽을 바라보았다.

“베넷, 나는 현명한 선택을 하고 싶어요. 전에는 내 가치를 의심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당신이 내 가치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내 자신감은 끄떡없었죠.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은 순간 나를 하찮게 여기는 당신을 보니….”

클로에는 고통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370~3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