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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송곳>
이예지 사진 백종헌 2015-06-18

<송곳> 1, 2, 3권 최규석 지음 / 창비 펴냄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되어 폭발적 인기를 끈 <송곳>이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을 연재한 최규석 작가의 장편작 <송곳>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까르푸-이랜드 실화를 바탕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철저한 취재와 구성으로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하종강 주임교수가 “내 강의를 듣는 것보다 <송곳>을 보는 것이 더 많은 공부가 된다”고 평한 작품이기도 하다.

의미 있는 실화만으로 좋은 작품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주호민 작가는 “이런 소재로 이런 재미를 뽑아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송곳>을 평했다. <송곳>의 재미는 일차적으로 캐릭터의 승리다. 까르푸-이랜드 사태 당시의 김경욱 노조위원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주인공 이수인은 준비된 투사가 아니다. 최규석 작가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김경욱 노조위원장의 이력을 살려, 원칙을 중시하며 불의를 넘기지 못해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인 이수인을 만들어낸다. 열정적인 리더도 친근한 동료도 아닌 어떤 전형성에서 탈피한 이수인의 캐릭터성은 독특하다. 비사교적인 그는 무표정하고 무심한 얼굴로 묵묵히 일하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만다. 이수인과 호흡을 맞추는 노동운동가 구고신 역시 판에 박힌 인물이 아니다. ‘떼인 돈 받아주는’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는 구고신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온몸으로 겪어온 인물로서 생활형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넉살 좋아 보이는 구고신은 그 이면에 혹독하게 당해온 암담한 역사의 찌든 때와 절망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한발을 더 내딛으려는 그가 이수인과 함께 벌이는 콤비플레이는 감동과 만화적 재미를 준다.

밀도 높은 전개와 인상적인 연출도 <송곳>의 매력이다. 최규석 작가는 살아가면서 보편적으로 마주치는 상황과, 그때 느끼는 인간의 감정들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포착한다. 담담한 독백과 절묘한 비유를 엮어내는 연출에서 둔중하게 밀고 오는 충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

비겁하고 무력해 보이는 껍데기를 잡고, 흔들고, 압박하면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발 앞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1권 190쪽)

“이봐요, 이수인씨. 기억하세요. 당신이 지키는 건 황준철이 아니라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2권 62쪽)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자기 앞에 몇명이나 있는지를 헤아리던 겁먹은 눈들이 옆이 아닌 앞을 보기 시작했다.(2권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