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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타적 유전자
손아람(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5-05-26

자살은 진화 이론이 마지막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생명이 목표하는 모든 일의 대전제가 생존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은 진화를 관장하는 생존 도그마에 완벽하게 어긋난다. 진화심리학자인 데니스 데 카탄사로는 개체로서의 번식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을 때 유전자를 공유하는 부양 친족에게 생존 자원을 몰아주는 옵션이 자살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서에 ‘섹스할 기회가 없어서’라고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죽어서도 수치스러울 만큼 엄청난 고백이다. 무의식에 박아둬야만 한다. 카탄사로의 연구에 따르면 자살 충동과 생활 변수의 상관관계는 지난달의 섹스 빈도, 성공적인 이성관계, 평생의 섹스 빈도, 안정적인 이성관계, 지난해의 섹스 빈도, 자녀 수 순서였다고 한다. 이 상관성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생식 잠재력이 낮은 사람들, 친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는 사람들, 그리고 여자보다 남자 사이에서 높게 나타났다. 연구 결과는 자살이 생식 및 양육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자살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에게 기회를 양보하기 위해 사라지는 것, 말하자면 아서 밀러의 희곡인 <세일즈맨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자살에도 목적이 있다는 연구 결론은 다소 비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인간의 행동조차 비록 그것이 너무나 끔찍한 결정일지라도, 단지 무의미한 낭비가 아니라 선량하고 이타적인 의지에 바탕해 이뤄진다는 사실은 최소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량함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얼간이들의 전유물로만 관찰되는 평균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예로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있는데, 모든 문화권에서 가장 특별한 얼굴이 아니라 가장 평균 비례에 가까운 얼굴이다(평균이 되기가 그만큼 어렵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평균’이란 발현 유전자의 유용성이 오랜 기간 동안 강력하게 선호되어 집단의 표현형을 잠식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가 구성원들이 표준적으로 선량해지도록 강요하고, 심지어 그 가치에 수긍하지 않는 자들조차 적어도 표준 지향적인 위선을 시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선량하게 길들여지는 것은 얼간이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위선은 줄곧 종교가 된다. 위악은 정치가 된 적조차 없으며 하위문화를 간당간당하게 형성할 만큼 허약하다. 선은 존재가 의심스럽고, 악은 가끔 세상을 정복하고, 위선은 세상을 바꾸고, 그런데 위악은?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베’는 이 시대 위악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온갖 패륜적인 농담이 범람하는 곳이다. 하지만 인간은 악당놀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는 것 같다. 일베의 검색창에 ‘불치병’ 혹은 ‘유기견’ 등의 검색어를 입력해보라. 기대 혹은 우려와는 전혀 다른 위악의 빈틈을 보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무지할 때는 얼마든지 사악해질 수 있지만, 스스로 느끼는 만큼 사악해질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