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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질주한다, 반영웅들은 길 위를 지배한다
송경원 2015-05-29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실현하는 방식

단언컨대 올해의 마스터피스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가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이 정도의 결과물을 상상하진 않았다. <매드맥스>를 부활시킨다는 소식에 일부 장르 팬, 특히 원작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기대보다 우려가 먼저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매드맥스>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리메이크의 생리와 한계를 이미 수차례 체험했기 때문이다. 대개 리메이크 작품은 원작의 기대와 성취에 기대기 마련이라 원작이 보여주지 못했던 기술적인 진보에 사활을 걸다가 나자빠지기 일쑤다. 그때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고 하면 누구나 기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좀더 많이, 좀더 자세히, 내 머릿속에만 맴돌던 이미지를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겨 담고 싶은 게 사람 마음, 감독 마음 아닌가.

<분노의 도로>도 본질적으로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걷는다. 원작의 감독이었던 조지 밀러는 마치 내게 자본과 조건, 시간을 충분히 주면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밀도 높은 비주얼을 스크린 위로 쏟아붓는다. 관객은 2시간 동안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카체이싱과 8기통 엔진의 굉음 앞에 말 그대로 압도당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순수하게 정제된 액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효과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구축할 수 있는 재현으로서의 액션의 완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적어도 천재적인 누군가가 있어 전혀 다른 방향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이제까지 영화라는 매체가 걸어온 문법 안에서 이 이상의 화면을 상상하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의 도로>의 첫 번째 미덕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액션의 물량 공세를 주요 전략으로 삼는 영화가 제일 먼저 부딪치는 난제는 의외로 지루함이다. 소리만 키운다고 귀가 즐거운 게 아니듯 자극이란 완급과 리듬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 단적인 예로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물량 공세를 통한 스펙터클의 확장은 관객의 감각을 쉽게 마비시키는 측면이 있다. 도시가 뒤집어지는 스케일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규모를 늘려도 자극은 둔해진다. 폭파에 대한 마이클 베이의 집착은 나름 미학이라 부를 만한 지점까지 도달하지만, 블록버스터 전략 측면에서는 그저 소모적이다. <분노의 도로>가 특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묵직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운) 액션 시퀀스가 쉼 없이 이어지는데도 액션 자체의 쾌감은 마르지 않고 샘솟는다. 다 때려부수고 관객을 정신없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트랜스포머>는 지루하고, <분노의 도로>는 경이로운가. <매드맥스>의 질주는 기존의 카체이싱 영화들과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걸까. 이 단순한 의문으로부터 전설의 귀환을 환영해보려 한다.

바퀴 달린 웨스턴의 귀환

솔직히 말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지치긴 했다. 다만 장소와 상황만 바뀐 유사한 액션의 반복에 질린 건 아니다. 그보다는 진하고 빡빡한 액션을 쉴 틈 없이 접하다보니 순수하게 물리적인 한계에 가까운 피로감이 차올랐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체험 가능한 액션의 물리적 한계에 서 있다. 동시에 그토록 빽빽하게 채워진 액션과 카체이싱이었음에도 겹치거나 유사한 시퀀스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기적과도 같은 완성도를 선보인다. 비결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설계했기 때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영화의 출발부터 글이 아닌 스토리보드를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설정했다고 한다. 대본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그려진 3500여장의 스토리보드판이 실질적인 초고 역할을 했는데 이는 실제 촬영된 장면 수와 비슷하다. “추격전을 말로 옮기기란 쉽지 않다. 가령 ‘선더 스틱을 던지고 차가 폭발한다’라고 글로 쓸 수도 있지만 투척하는 정확한 위치, 폭발의 양상들을 정확히 잡아내기엔 그림이 더 낫다. 그래서 우선 이미지로 만들고 나중에 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했다”는 조지 밀러의 설명은 <분노의 도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철저히 이미지를 중심에 놓고 살점을 붙여나간, 액션으로 쌓아올린 일종의 무성영화다. “영화는 자막 없이도 세계 어디서든 보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철학에 충실한 건 오리지널 시리즈나 이번 리메이크나 매한가지다.

조지 밀러 감독은 액션의 다채로움과 속도감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를테면 각 인물의 사연, 세계관 등)을 최소화한다. 등장인물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방대한 세계관을 깔아두고 있지만, 구태여 사건을 통해 설명하지는 않는다. 강조하건대 생략이 아니다. 구구절절한 대사 대신 액션을 통해 표현했을 뿐이다. 설정도 필요하고, 세계관도 중요하며, 캐릭터의 사연과 깊이, 감정이입 모두 필수불가결한 요소지만 이 영화의 근본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깔려 있다. 애초에 오리지널 <매드맥스> 시리즈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추격전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물과 기름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 그 자체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매드맥스> 시리즈는 방대하고 디테일한 설정과 무관하게,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영화다.

이토록 정신없는 액션이 난무하는 영화에서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분노의 도로>가 선보이는 액션은 어쩌면 초기 무성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일종의 율동에 가깝다. 이 영화에는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오직 움직임과 리듬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태도가 묻어 있다. 영화 속 모든 소품과 액션 시퀀스에는 각 캐릭터의 상황, 사연, 성격, 대사가 반영되어 있다. 맥스의 자동차 인터셉터부터 퓨리오사의 중전차 워 리그까지 150여대, 19종의 차량은 각 운전자에 맞춘 개성을 형성화한다. 별다른 대사가 없어도 차들이 부딪치고 깨지고 터지는 과정만으로도 이야기는 성립한다. 1979년 <매드맥스>가 첫 등장했을 때 이 시리즈가 “바퀴 달린 웨스턴”이라 평가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토리는 초기 서부극처럼 심플하다. 세계의 구성은 오직 달리고 뒤쫓고 부수고 폭파시키고 뒤집는 걸로 채워져 있다. <분노의 도로>가 지금에 와서 다시 마스터피스가 될 수 있는 건 클래식영화 속 움직임의 미학을 최대한으로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대재앙 이후 22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21세기에 만들면서 “무성 시대부터 서부극을 토대로 하여 성장해온” 영화의 기초적인 속성으로 다시금 돌아가려 한다.

메탈 사운드로 무장한 무성영화

<분노의 도로>의 스토리는 가볍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단순하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22세기,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하는 독재자와 이에 저항하는 이들간의 생존을 건 추격전. 마음만 먹으면 한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다. 30년 만에 부활한 시리즈는 여기에 시대 변화에 맞춘 사소한 설정 몇 가지와 새로운 캐릭터, 소품들을 덧붙였다. 이야기는 임모탄(휴 키스 번)이 물과 기름을 독점해 지배 중인 시타델로부터 출발한다. 떠돌이 맥스(톰 하디)는 근방을 지나다가 희귀혈액형이라는 이유로 잡혀와 피주머니 노릇을 한다. 이후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임모탄에게 반기를 들고, 작전 수행 중 임모탄의 여인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함께 도망치게 된 맥스와 퓨리오사 일행을 임모탄, 무기공장, 가스타운의 연합군대가 맹렬히 뒤쫓는다.

주인공은 살기 위해 달리고 악당은 이를 뒤쫓는다. 이 단순무식한 명제를 2시간 내내 몰아붙일 수 있는 원동력은 앞서 언급한 풍성하고 다채로운 액션 시퀀스에 있다. 놀라운 건 카체이싱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지만 단 한순간도 같은 장면은 없다는 사실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 영화에는 120분 안에 구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카체이싱 액션이 들어 있다. 크게 30분 단위로 쪼개지는 4개의 시퀀스는 내내 비슷한 누런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짐에도 전혀 다른 개성이 녹아들어가 있다. 우선 퓨리오사의 워 리그와 고슴도치 같은 버자드족의 습격, 이에 대항하는 워보이들의 선더 스틱을 활용한 곡예가 이어진다. 거대한 모래폭풍에서 익스트림 롱숏의 쾌감을 선보인 후 맥스와 퓨리오사의 맨손격투가 벌어지고 이어 협곡에서의 오토바이 액션이 추가된다. 어머니들의 땅으로 향하는 밤의 습지에서는 무기공장의 대장과 오페라 같은 총격 신을 주고받는다. 후반부엔 여러 매체와 평단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워보이들의 애크러배틱한 장대 액션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창의적인 액션 시퀀스의 향연. 빽빽한 액션의 연쇄에 몸이 지칠지언정 눈이 즐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인류 대부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분노의 도로>의 정서는 의외로 휴머니즘의 그늘 아래 있다. 생존이 목적이라는 맥스가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는 건 그가 아직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해내지 못한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그는 영화가 선보이는 액션처럼 한없이 순수하다. 니콜라스 홀트가 연기한 워보이 녹스도 마찬가지다. 워보이로서 녹스는 의미 있게 죽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서 임모탄을 맹신한다. 자신을 기억해줄 만한 다른 존재를 만나는 순간 그 믿음은 쉽게 깨진다. 작품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여전사 퓨리오사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소유물 취급당하던 임모탄의 여인들을 해방하고 ‘어머니의 땅’으로 데려가려는 것은 스스로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다. 퓨리오사는 여인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기에 그토록 필사적이고 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분노의 도로> 속 인물들은 그 누구도 정의롭진 않지만, 폭압의 상징 임모탄조차 생존이라는 명제 앞에 순수하다. 그것이 순수 악이든, 순수 욕망이든 크게 상관없다. 이 영화는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원에의 욕망이 충돌하는 게임이다.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인물상은 조지 밀러의 다른 작품에서도 반복된다.

오리지널 <매드맥스>에서 웨스턴, SF 등 각종 서브 컬처들을 흠뻑 버무려낸 끝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그는 다시금 그 세계로 돌아가 단 하나의 가치에 집중한다.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같은 영화,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로큰롤을 위해 영화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작품 내내 액션의 리듬감을 짜맞추는 데 사력을 다하는 조지 밀러 감독의 모습은 두프 왜건의 번지점프 줄에 매달린 맹인 기타리스트와 닮았다. 영화 내내 귀를 마비시킬 정도로 울리는 자동차 배기음과 총성, 폭발음이 그의 악기인 셈이다. 사실 영화 속 차량 중에 가장 비현실적(혹은 영화적)인 것이 바로 메탈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두프 왜건인데, 바로 그 차량과 감독의 그림자가 겹친다는 점이 또 이 영화의 의미심장한 면이다. 카멜레온처럼 변주되는 연출 스타일을 자랑하지만 조지 밀러의 선호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무성영화적인 율동의 힘, 그리고 조화로운 음악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는 일찍이 오리지널 <매드맥스> 시리즈를 통해 무성영화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표했다. “위대한 음악이 했던 일을 성취하고 싶었다. 거친 록 콘서트와 록 오페라의 중간 정도에서 관객이 엉덩이를 들썩일 만큼 빠져들길 바랐다”는 감독의 고백은 <분노의 도로>의 지향점이 어딘지 분명히 알려준다. 조지 밀러의 필모그래피는 때로 분열적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스타일과 추구하는 미학, 인물에 대한 관점과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 모두가 하나로 결합된다.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의 도로>를 통해 형식과 메시지, 지향이 일치할 때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한다.

아날로그는 나의 힘

앞서 말했듯 기술은 진보했고 80년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할 화면들이 재현 가능해졌다. ‘그리는 영화’가 대세가 된 지금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비주얼을 화면에 고스란히 옮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해피피트>를 연출한 감독에게 그리 낯선 방식도 아니다. 하지만 조지 밀러 감독은 이번엔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다. <분노의 도로>는 80% 이상을 CG 없이 직접 촬영했고 수많은 스턴트맨을 나미비아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밀어넣었다. 조지 밀러에게 필요한 기술은 그린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그려넣는 게 아니라 스턴트맨을 보호할 와이어를 지우는 것이었다. 그는 1편에서는 자동차 앞에 매다는 게 전부였던 카메라를 실제 질주하는 차량 곳곳에 배치하길 원했다. 기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오리지널 <매드맥스>에서부터 혁신이라 칭송받았던 역동적인 카메라 시점은 극적으로 확장된다.

사실 <분노의 도로>는 자동차가 질주하는 영화가 아니라 카메라가 자동차 사이를 헤집고 내달리는 영화다. 영화 속 카메라는 문자 그대로 인물과 자동차 사이를 현란하게 질주하며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자동차들을 거의 애무하다시피 훑는다. 이 영화를 카체이싱 액션의 마스터피스 반열에 올리고 싶은 건 그와 같은 카메라의 동선이 곧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디든지 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는 엣지 암 시스템을 활용한 소위 ‘파파라치 카메라’들은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환상적인 시점들을 잡아낸다. 이를 통해 관객을 액션의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CG는 철저히 그리는 쪽이 아니라 와이어와 카메라를 지우는 방식으로 사용됐는데 그것이 꼭 아날로그만이 안길 수 있는 특정한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매드맥스>는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다”는 말처럼 이 영화의 액션은 처음부터 단단히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 재현 가능한 액션을 의외의 각도에서 포착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속도와 박진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분노의 도로>는 “자동차가 있고 달리는 걸 찍을 수 있는데 왜 굳이 CG로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단순명료한 직구를 던진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본질적으로 오늘의 장면이다.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담는다는 건 효과로서의 ’리얼리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필름에 기반한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은 ‘현실적인 것’의 효과를 자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찍는다는 행위 자체를 현실로 지시한다. 우리는 가상의 영화세계를 보면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동시에 상상할 수 있다. <분노의 도로>를 감상할 때 맥스의 공허함과 퓨리오사의 갈망, 녹스의 애처로움에 감정이입하는 게 당연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카메라를 든 조지 밀러의 환희도 느낄 수 있다. 이 암울하고 황폐한 세계가 매혹적인 것은 그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미니멀한 설정의 세계에서 마음껏 카체이싱을 펼치는 감독의 심정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가상의 미래를 그리는 순간에도 그것은 현재가 투사된 결과물이며 상상을 기반으로 한 세계에서도 카메라의 움직임만은 진실이다. <분노의 도로>는 어떤 의미에선 인물이 아니라 쾌감에 몸서리를 치는 카메라와 동조하는 영화다. 그러므로 카메라는 실제로 움직이고 질주하는 자동차 사이를 누비며 찍어야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기반으로 한 이 극단적인 장르에조차,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카메라의 역할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식이라고 비난할지 몰라도 영화의 근본은 아직 아날로그가 주는 존재감, 필름이 주는 리얼리즘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분노의 도로>가 집착한 실제 자동차 액션과 아날로그 촬영방식은 그래서 빛난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조지 밀러는 그저 <매드맥스>의 세계에 어울리는 방식을 취한 것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믿고 싶다. 30분 단위로 나뉜 이 영화 속 4개의 액션 시퀀스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는 음악’으로 탈바꿈하는 건 조지 밀러가 자신의 상상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찍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라고. <분노의 도로>는 지금은 멸종 중인 필름의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액션의 정수를 모아 카메라의 우아하고 격렬하며 농후한 움직임 속에 담아냈다. 이런 방식의 영화가 또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러길 희망한다. 적어도 카체이스 액션은 <분노의 도로>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영화는 디스크나 캔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영화관에 모여 몰입하는 공유된 경험”이다. 디지털영화가 지배하는 21세기라지만 이런 강렬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한 이상 질주를 멈출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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