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산과 들은 꽃 천지일 터이나 5월의 주머니 사정은 빚 천지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고 여러 지인들의 생일에 날이 좋아 주말마다의 결혼식은 흔히 말해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애교. 물론 가장 쉬운 건 돈이다. 빠르고 간편하며 뒤끝도 없다. 그러나 그만큼 쉽게 잊고 잊힌다. 발품을 팔아가며 선물을 사러 돌아다녔던 이유는 단 하나, 그 순간만이라도 정을 나눈 이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와의 추억을 되새김하기 위해서다. 레고 블록보다 퍼즐 조각을 즐겨 만진다는 것, 콩나물보다 숙주를 즐겨 먹는다는 것, 장미보다 백합을 즐겨 꽂는다는 것, 라운드 티셔츠보다 브이넥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는 것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안다는 일은 사실 얼마나 귀한가.
고민 끝에 올해 5월의 각종 기념일 선물을 ‘책’으로 통일했다. 편집자가 업이니 책이면 거저인 줄 아는 이들이 꽤 되는데 천만에, 내가 만든 책이라 해도 나 역시 서점에서 제값을 주고 산다. 책을 대하는 나만의 예의랄까 의무랄까. 행여 이슈가 되는 책이라도 출간할라치면 그거 하나 보내달라며 별별 데서 별별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니 그때마다 감정적인 나는 서글픔을 앞세우기보다 육두문자를 혀끝에 살짝 말아 감춘 채 냉정해지기 일쑤다. 하루에 커피 석잔은 아낌없이 사마시면서 책은 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새똥 정도로 여기는 걸까. 물론 책의 귀함을 돈보다 우위에 놓는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다. 고무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작은 규모의 서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게 증거니까.
골목 구석구석을 점령한 카페들 사이에서 감각적인 이름을 단 소규모 서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그 서점들을 찾아갔을 때 나는 주인장들의 얼굴에서 순전한 순정을 바로 읽어냈다. 좋아하는 놀이를 할 때의 어린이는 얼마나 천진한지. 장사를 목적으로 한다지만 그들이 계산기보다 중히 여기는 건 ‘취향’의 공유였고 ‘함께’라는 연대였다. 저자와 제목을 대면 빽빽하게 꽂힌 서가에서 책을 꺼내 건네는 대형서점의 직원들과 달리 작은 책방의 주인들은 무엇을 읽어야 할까 고민하는 우리에게 한참의 궁리 끝에 저자와 제목을 조심스레 말하고 테이블 위에 듬성듬성 놓인 책 중 한권을 집어 우리에게 건넨다. 이미 읽은 자의 아름다운 부연이 얼마나 큰 신뢰를 주는지 신문 한 귀퉁이에 이주의 베스트셀러 같은 도표를 독서의 기본 리스트로 알고 사는 이들은 짐작이나 할까.
또 한곳의 실험서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의 도서관이라는 테마를 필두로 규모를 떠나 책과 관계된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책을 선별하여 전시 판매한다는 그곳에서 현재 팔고 있는 책은 단 두종. 출판시장의 장기 불황 속에 이런 소소한 움직임의 다양성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터. 결심하노니 훗날 단 한권의 책만 파는 서점의 꼬부랑 백발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평생을 걸고 자부할 수 있는 단 한권의 책, 그 책의 판권에 만든 이가 내 이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