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아니, 이성애자 페미니즘. 아니, 이성애 중산층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백인 여성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여성 인구만큼이나 많다. 지향도 다 다르다. 페미니즘은 다양하지만 공통 이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사유 체계다.
마르크스주의부터 채식주의까지 모든 주장은 ‘가장 올바름’을 경합하는 성질이 있다. 정통(authenticity)과 기원 논쟁은 위험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이 실천으로서 요구되는 상황을 제외하면, 인간의 행위가 있을 뿐 고정된 행위자는 없다.
페미니스트라는 지칭은 그에 합당한 행동을 일관되게 했을 때 남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문제다. 스스로 자칭하는 것은 국어에도 맞지 않고 민망한 일이다. 여성학 강사나 여성학 교수라는 직업이 여성주의 면허증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변화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어느 ‘~ 주의’나 그렇듯, 완장 차고 설치는 보안관들이 있기 마련이다. 서구 이론을 잣대로 삼아 자기 사회의 역사를 모를 때 그럴 확률이 높다.
내가 아는 한, 여성주의와 여성학은 조금 다르다. 여성주의는 일종의 인식론이고 여성학은 ‘그보다는’ 작은 범주다. 여느 사상들처럼 여성주의도 특정 시각에서 여러 분야의 지식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여성주의를 지향하지만 여성학을 공부할 수도 문학이나 영화, 평화학을 공부할 수도 있다.
그래도 위에 적은 문제는 행복한 고민이다. 1990년대까지도 페미니즘을 여자에게 맡길 수 없다고 걱정한 일부 남성들이 주최한 ‘과학적’, ‘올바른 페미니즘’ 명의의 강좌가 있었고 수강생도 많았다. ‘배운 남성’이 ‘문맹 여성’을 위해 “딸들아 일어나라”라며 선생 노릇을 한 것이다. 특정 시대의 해프닝이었다. 성별(젠더), 계급, 인종. 이 세 가지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적대적 모순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올바른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칠 수 없고, 백인이 흑인에게 그럴 수 없다. ‘자본가’, ‘백인’, ‘남성’은 발언하기 전에 자기 위치부터 고민해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드물다.
잊을 만하면 ‘유명’ 남성의 여성 관련 발언이 문제가 된다. 많은 경우, 앞으로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인식 수준은 진화하는 대신 반복될 것이다. 오만과 무지가 유일한 이유이자 무기다. 굳이 비유하면, 그들의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구한말 카메라가 영혼을 빼앗아간다고 믿은 조선인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 같다. 심각한 문화 지체 현상이다.
지금 이 글처럼 이런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지도 모른다. 가십도 무식도 가이드라인이 있는 법이며, 무지에는 무반응이 정답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종종 (일부라고 해야겠지) 한국 남성과 같이 산다는 것은 무서운 사람과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느낌은 세월호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