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마자 지하철역 10번 보관함에 버려진 아이. 이름도 1과 0에서 따와 일영(김고은)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아이는 낯선 세계 차이나타운에 들어선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길 없는 여인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엄마’(김혜수)라고 부른다. 엄마가 이끄는 차이나타운은 매정하다. 이주노동자들의 밀입국을 도와 돈을 벌고,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는 장기 적출 ‘수술’까지 해서라도 돈을 받아낸다. 엄마의 원칙은 단 하나. 돈을 버는 데 쓸모 있는 인간만 식구로 거둬들인다. 일영은 그런 엄마의 세계를 보고 자란 아이다.
한준희 감독의 데뷔작 <차이나타운>은 한국형 범죄 누아르물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던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다. 기존 영화에서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돈과 권력의 파워 게임의 주체는 엄마로 대체됐다. 차이나타운의 실세인 엄마는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 꺼풀 덜 보여주고 감정을 한번 식히고 들어가는 엄마 캐릭터는 극의 베이스 톤이 돼 무게감을 더한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일영과 엄마의 대립이 이뤄지는 중반 이후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보여준 석현(박보검)의 등장으로 일영은 비정한 엄마의 세계에 피로감을 느낀다. 결정적인 순간, 일영은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고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냉혹한 질문과 마주한다. <차이나타운>이 보여주는 놀라운 장면들의 상당 부분은 이 순간에 배우 김고은이 뿜어내는 결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이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지향을 보여줬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일영이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는 시작 지점과 둘의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는 결정적 순간은 결국 외부 세계에서 온 남성의 등장과 퇴장이 주요했다. 일영의 마음을 흔드는 석현과의 교감이 다소 뜬금없고 낯간지럽게까지 그려져 이들의 관계가 다가올 일영과 엄마의 대립을 위한 예고된 설정처럼 비치기도 한다. 힘겹게 시작된 엄마 세계로부터의 일영의 탈주가 엄마가 일군 집으로 회귀되고 유사 모녀지간인 엄마와 일영의 관계가 또 하나의 권력 승계 안에 머물고 마는 것 역시 아쉽다. 무드와 뉘앙스 안에서 설명되지 못한 차이나타운의 인물들의 사연도 서사의 공백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일 일영만큼은 또렷이 그려진다. 그럴듯한 그림을 보여준 신인감독의 뚝심만큼은 끝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