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는 <훔친 키스>(1968)에서 델핀 세리그를 ‘사람이 아니라 가상’이라고 감탄한다. 주인공인 장 피에르 레오의 대사를 통해서다. 탐정 수업 중인 레오는 구둣방 주인의 아내인 세리그를 뒷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만 그녀의 미모에 정신을 잃고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린다. 청년 레오의 눈에 세리그는 ‘첼로의 목소리’를 가진 천상의 존재처럼 보였던 것이다. 영화 경력의 초기에 세리그는 그런 신비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알랭 레네의 뮤즈로 등장
델핀 세리그는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에 출연하며 단숨에 주목받았다. 기억되지 않는 과거, 혹은 상상된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다루는 난해한 작품에서 델핀 세리그는 그 작품만큼이나 지적인 이미지로 각인됐다. 날카로운 눈매, 차가운 표정, 그리고 대화를 통해 남성을 주도하는 태도 등 당시의 일반적인 여배우들과는 사뭇 다른 지성미가 넘쳤다. 세리그는 여기서 코코 샤넬 디자인의 검정색 드레스를 주로 입고 나오는데, 그 색깔처럼 엄숙하고, 권위적이고, 또 죽음을 느끼게 했다. 엄정한 이성과 유령 같은 권능이 세리그의 매력으로 돋보였는데, 트뤼포가 말한 ‘아름다운 가상’은 여기서의 캐릭터에서 연유했을 것 같다. 아름답지만 초월적인 존재 같다는 의미일 터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는 당대 문학의 첨단을 걷던 ‘누보로망’의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세리그는 이들 젊은 개척자들, 곧 알랭 로브그리에,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녜스 바르다, 그리고 알랭 레네 등 ‘좌안파’(Rive gauche)로 불리는 영화 집단과 어울리며 자신의 지적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그리고 누벨바그 영화인들과는 달리 좌안파들은 자신들의 좌파적 정치 성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는데, 세리그도 마찬가지였다. 세리그는 여성주의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열정적인 지지자였다.
세리그는 레네의 <뮤리엘>(1963)에 연속해 출연하며, ‘좌안파’의 대표 배우로 수용됐다. 세리그는 배신당한 사랑의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데, 그 기억의 사실 여부는 늘 흐릿해져 있어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처럼 <뮤리엘>도 결국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연대기적 순서가 붕괴되는 실험작이 됐다. <뮤리엘>에서 세리그는 30살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머니를 연기했다. 아들은 알제리 전투의 기억으로 점점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세리그는 첫사랑의 상처와 아들의 고통 사이에서 신경증을 앓는다. 이 역할로 세리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세리그가 지적인 배우라는 일방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코미디 감각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게 루이스 브뉘엘의 작품들을 통해서다. 브뉘엘의 ‘여행 3부작’의 첫 작품인 <은하수>(1969)에서 매춘부로 짧게 나온 뒤, 두 번째 작품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에서는 사업가의 아내이자 밀수를 서슴지 않는 남미 국가 대사의 정부로 출연했다(3부작의 마지막은 1974년작 <자유의 환영>). 여기서 세리그는 대단히 우아한 척하는 프랑스의 위선적인 부르주아 여성을 연기한다. 그 위선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세리그의 이미지, 곧 진지한 여성의 이면이 벗겨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기억될 <잔느 딜망>의 마지막 장면
델핀 세리그는 학자 집안의 딸이다. 부친은 고고학자이고, 모친은 역사학자이자 장 자크 루소 전문가이다. 특히 외가가 명망가 집안인데, 큰외할아버지가 기호학의 태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도 유명한 천문학자였다. 부모의 직업 때문에, 세리그는 외국을 돌아다녔는데, 어릴 때 레바논에서 성장했고, 10대 초반에는 뉴욕에서 살았다. 특히 중동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녀가 탈식민주의에 관심을 갖는 토대가 됐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누보로망 스타일의 작품인 <인디아 송>(1975)에서의 몽환적인 무드의 연기는 레바논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리그는 10대 중반이 돼서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연기 수업을 받았다. 10대 후반에는 다시 뉴욕에 가서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 가입했고, 여기서 메소드 연기의 기본을 익혔다. 뉴욕에서 당대 미국의 ‘비트 제네레이션’과 친분을 맺은 게 인연이 되어, 잭 케루악이 각본을 쓴 <풀 마이 데이지>(Full My Daisy, 1959)라는 작품을 통해 영화에 데뷔했다. 프랑스어, 영어, 독어를 구사하는 세리그는 데뷔 때부터 전세계적인 변화에 민감한 배우였다.
스크린에서의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는 현실에서도 실천됐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지자인 세리그는 1971년, 보부아르의 낙태의 권리를 위한 ‘전투적’인 선언(Manifesto of the 343 Bitches)을 주도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시청각센터’의 공동설립자로 참여했다. 이 기관은 여성의 권리, 여성의 영화 만들기를 지원하는 곳이다.
스크린의 이미지와 현실에서의 이미지가 통합된 세리그의 최고의 작품으로는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1976)을 꼽고 싶다. 애커만 감독이 약관 25살에 발표한 페미니즘 테마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감독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포효하는 사자 같은 이미지가 강한 젊은 페미니스트였다. 영화는 어느 중산층 여성의 일상화된 매춘을 다룬다. 주인공 잔느 딜망(델핀 세리그)은 마치 청소나 설거지를 하듯 매춘을 가사노동처럼 한다. 자신과 아들이 사는 집을, 또는 중산층으로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건 노동이기 때문에 딜망은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어떤 손님과의 관계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날 찾아온다. 너무나 많은 논란을 몰고 온 결말인데, 딜망은 관계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카메라는 살인을 저지른 뒤, 딜망이 식탁에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오래 비춘다.
딜망의 행위는 부르주아 가치관의 노예가 된 어느 여성의 자기각성의 순간으로 주로 읽혔다. 중산층의 편의를 무비판적으로, 혹은 자기편의대로 해석해온 여성이 삶의 본질과 갑자기 맞닥뜨린 자각 같은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그래서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결코 인식되지 않을 중산층 여성의 거짓된 삶에 대한 강력한 비판인 것이다. 일종의 여성으로서의 자기선언인데, 그 자각의 주인공으로 델핀 세리그가 출연한 것은 운명처럼 보였다. 그만큼 세리그는 진지한, 실천하는 여성주의 스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