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16일,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어제 일만 같은데 그새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갔다. 여전히 배는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고 유가족이 되고 싶어 드러누운 실종자 가족이 아홉 가정이나 되며 어처구니없는 일 처리로 질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대통령은 여전히 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어땠나. 처음엔 팽목항 언저리라도 가서 바다 냄새를 맡아야지 했었다. 울분에 차서 정부를 향한 쓴소리에 목소리를 얹고 또 얹어가며 시급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는 했었다. 뒤져보니 다 지난해 봄에 쏠려 한 일이었지 여름부터는, 가을과 겨울을 넘어서부터는, 내 살기에 급급한 흔적뿐이었다. 전세대란이 컸다. 장기불황의 여파는 밥벌이로 삼은 출판계를 먹구름처럼 뒤덮은 지 오래라서 사지도 않을 책을 만들기 위한 무기한의 무력한 노동은 결국 여러 병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며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은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그들 또한 앓고 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태어난 우리, 그러나 죽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 걸까, 무엇이 우리를 죽게 하는 걸까.
세월호 1주기를 며칠 앞두고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차마 차머리를 그리로 둘 수 없어 미루고 미뤘던 발걸음이던 차에 혼자였고 어쩌다 작정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뚜벅뚜벅 걷는 내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월요일 오후였다. 컴컴한 먹구름 아래 노란 플래카드가 여럿 눈에 띄었다. “지금 우리가 침묵하면 다음 희생자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들의 모임. 사라 유.” 이 당연한 말을 읽고 또 읽었다. 죽어야 산다지만 죽어서도 살 수가 없는 이 나라 아이들이 합동분향소 안을 꼬박 채우고 있었다. 저마다 어른이 될 포즈로 저마다 최대한 선보일 수 있는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찍었을 증명사진이 그네들의 영정사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혼자 찾은 분향소에 어쩌다 조문객이 나 하나였다. 자그마치 304명, 오늘의 나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올 생각이었다. 이름이라는 건 불러야 존재하는 명명이니 맨 웃줄 첫 번째 사진부터 쳐다보는데 제단이 너무 높아 가물가물 이름 석자를 적어내린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수많은 영정사진 위에 이따위 글귀는 누가 적었나.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이 나라의 모순은 어쩜 이리도 뻔뻔한가.
내 시선이 닿는 이들의 이름만을 부르는 일에 죄책감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니 가족과 친구들이 남긴 꽃과 초콜릿과 사진과 양초와 노트가 곳곳에 가득이었다. 그걸 읽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가만히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이 편지 한통을 손바닥에 적어내려갔다. “안녕 오빠 나는 예린이야. 생일 축하해. 너무 보고 싶어. 이번에 아이디를 바꿨어. 모냐고? 곰돌이 편지야. 한번 더 축하해 잘 지내고 있어? 사랑해. 마지막으로 생일 축하해. 알러뷰.”
모나미 볼펜심으로 써내려간 글자들로 가득한 손바닥이 빗물에 젖을세라 주먹을 쥔 채 합동분향소를 빠져나왔다. 경찰 둘이 우비를 입은 채 내 곁을 스쳐갔다. 우리는 그렇게 한세상을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