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는 <수상록>의 한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도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설명한다. 그는 여행에 자기 자신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다른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그 소망을 이룬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4285km에 달하는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를 걸어서 여행한 셰릴 스트레이드의 동명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와일드>에는 세상의 모든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대목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나누는 모녀의 대화다. 책 <와일드>에서 인용하면, 셰릴은 엄마 바바라에게 이렇게 말한다.“내가 지금 스물한살이 되어 얼마나 더 똑똑해지고 교양 있어졌는지 보면 놀랍지 않아요? 엄마의 스물한살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책에는 엄마의 대답이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와일드>에서는 엄마를 연기한 로라 던이 이렇게 답한다. “난 언제나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게 내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이 대화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라는 이슈로 반복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제임스 미치너를 읽는 엄마에게 자신은 에리카 종이나 에이드리언 리치,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는다고 한다. 엄마도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고. 그 작가들의 차이에 대해 영화는 설명을 생략하지만 책에는 보다 자세하게 쓰여 있다. PCT를 걷던 셰릴은 한 가족이 머무는 통나무집에서 씻고 식사를 하게 된다. 모처럼 뜨거운 물로 씻은 그녀는 식탁 끄트머리에 놓인 책 몇권을 보게 된다. 셰릴의 가방 안에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이 들어 있었다. 이미 완독했지만 다른 책이 없어 전날 밤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런데 ‘책을 읽을 생각이 있다면’이라며, 가족 중 아버지인 제프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가져다준다. “제임스 미치너는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였지만, 그 책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미치너의 책을 읽으며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대학 때 그녀가 만난 교수는 앞으로 정말 진지한 작가가 될 생각이 있다면 제임스 미치너의 책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충고한다. 그래서 셰릴은 제임스 미치너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훈계한다. “엄마는 그게 진짜 책이 아니라는 것도 몰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셰릴은 자신이 좋아하던 책들을 길 위에서 읽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공동 언어를 향한 소망>(한국에서는 <문턱 너머 저편>에 수록되어 있다)도 그중 하나다. 그중 <힘>이라는 시는 마리 퀴리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틀림없이 자기가 아픈 것을 방사선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가 정제했던 바로 그 요소 때문에 수년간 시달린 그녀의 육체 그녀의 두 눈에 생긴 백내장의 원인을/ 그녀의 손끝마다 피부가 갈라지고 고름이 나오는 원인을/ 시험 튜브나 연필조차 더이상 들고 있을 수 없을 때까지/ 부인했던 것 같다// 그녀는 상처를 부인하면서 아주 유명한 여인으로 죽었다/ 자신의 상처가 자신이 지닌 힘과 똑같은 원천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이제 길 위에서, 셰릴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밤바다의 등대처럼 아끼는 동시에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은 나도 그의 책을 엄청 좋아했으면서. 열다섯살에 <떠돌이들>을 네번이나 읽지 않았던가.”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 <남태평양 이야기>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진짜 책’ 논쟁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 이유를 <와일드> 책과 영화에서 생각해보기가 재밌고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짜’(혹은 ‘가짜’)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말 그런 이분법은 존재할까? 그 구별짓기는 우리 자신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