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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신화가 된 스타의 삶

하라 세쓰코

종종 스타의 신체적 태도는 그 자체로 한 국가의 문화가 되곤 한다. 이를테면 존 웨인의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태도와 미국 문화의 친연성을 떠올리면 되겠다. 설사 그것이 신화라고 할지라도 역설적이게도 신화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렇다면 전후 일본 문화에서 하라 세쓰코의 의미는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미인이고, 품위 있고, 겸손하고, 희생적인 하라 세쓰코의 이미지는 전후 일본 문화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그 이미지에 반했고, 지지했으며, 더 나아가 세상의 관객도 하라 세쓰코의 스타성에서 일본 문화의 품위를 읽는다.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 신화는 대개 사실을 압도하고, 그렇다면 신화의 주인공이 된 하라 세쓰코는 영원히 영화의 기억 속에 남을 흔치 않은 배우가 된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그녀

하라 세쓰코는 패전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를 반성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표방할 때 스타로 우뚝 섰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의 청춘에 후회는 없다>(1946)를 통해서다. 여기서 하라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좌파 지하운동가의 아내로 나온다. 군부가 이데올로기를 독점하며 총칼을 휘두르던 그때에, 운동가와의 결혼 자체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 용감한 결정이었다. 남편이 옥사한 뒤, 하라는 ‘매국노의 가족’이라는 이웃들의 폭력적인 배척 앞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더욱 꿋꿋하게 홀로 된 삶을 개척해나간다. 굴복하지 않는 그 삶이 마치 군국주의의 천박한 폭력에 저항하는 품위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고귀한 희생으로 비쳤다. 어느덧 하라에겐 품위, 희생, 고결함 같은 이미지가 각인됐고, 하라는 ‘시대의 상징 같은 존재’로 우뚝 선 것이다.(<일본영화 이야기>, 사토 다다오 지음)

‘하라의 신화’는 오즈 야스지로를 만나며 더욱 꽃핀다. <만춘>(1949)을 통해서다. 하라의 경력은 오즈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만춘>은 그의 배우 경력에서 큰 전환점이 된다. 이때부터 하라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아버지와 딸’에서의 역할이다. 오즈 드라마의 중심에는 늘 양보하는 아버지의 의미가 강조돼 있는데, 그 맞은편에는 만약 그 양보를 누군가 해야 한다면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딸의 희생이 뒤따른다. 항상 맑게 웃는 얼굴에, 약간 고개를 숙이고 말하며, 할 말을 상대에게 양보하는 둣한 작은 목소리, 그리고 감사의 마음에서 흐느끼는 울음까지, 하라의 모든 태도는 일본인(특히 여성)의 모범이 됐다.

하라가 며느리로 나오는 <동경 이야기>(1953)는 ‘아버지와 딸’의 변주다. 여기서 하라는 전쟁 미망인이다. 시부모가 동경에 오랜만에 여행을 왔는데, 의사 아들 부부, 미장원을 경영하는 딸 부부는 바쁘다는 등의 이유로 부모를 거의 방기하다시피하고, 이젠 남편도 없어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며느리 노리코(하라 세쓰코)가 시부모를 가장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혼자 사는 노리코가 방 하나짜리 서민 아파트에 시부모를 초대하여, 가난하지만 대단히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는 장면은 ‘아버지와 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다.

이런 역할, 곧 겸손하고 희생적이며 품위 있는 여성은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친 과장일 수 있다. 그래서 ‘일본 누벨바그’의 후배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의 세상을 ‘거짓’이라고 비판했다. 이마무라 영화에서 보듯, 패전국 일본엔 추악한 생존경쟁이 난무했지 배려하고 양보하며 서로 사랑하는 인물은 구름 위에 존재하는 이상형이라는 것이다. ‘거짓’이고, ‘이상형’인데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 곧 신화인데,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그런 믿음을 이끌어낼 가공할 인격을 가졌다는 증거일 터다. 말하자면 스타에겐 사실 여부보다 사실을 넘어서는 신화적 성격이 더욱 중요한데, 하라 세쓰코에겐 그것이 있었다.

나루세 미키오의 그녀

대가족의 딸인 하라는 영화계에서 일하는 형부의 도움을 받아 10대 때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동아시아를 비극으로 몰아넣을 때, 하라는 뛰어난 미모와 정갈한 인상으로 단번에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한다. 노골적인 친나치, 군국주의 작품인 독일-일본 합작영화인 <사무라이의 딸>(1937)에서 하라는 전통적인 일본 여성을 연기하며, 미래의 스타로 이미 주목받았다. 17살 때다.

오즈와의 협업(모두 여섯 작품)으로 ‘영원한 처녀’라는 별명까지 들으며, 하라는 청순하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힌다. 이때 만난 또 다른 거장이 나루세 미키오이다. 그와는 두 작품, 곧 <밥>(1951)과 <산의 소리>(1954)를 찍었다. 오즈와의 작품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강조됐다면, 나루세의 작품에선 ‘여성 그 자체’가 강조된다. 곧 오즈의 여성이 순종적이라면, 나루세의 여성은 독립적이다. <밥>에서 하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 연애결혼을 했는데(그런 결정이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었다), 철없는 남편은 여전히 총각처럼 살고 있고, 그녀는 부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점점 지쳐가는 아내 역을 맡았다. 하라는 오즈의 여성처럼 화사하게 웃기보다는 동경에서 독립할 일자리를 찾기 위해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의지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한 오즈의 딸은 결과적으로 전통의 질서 속으로 통합된다면, 실존의 주체로서의 나루세의 여성은 관습적인 가치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밥>의 결말은 어쨌든 가족으로의 귀속으로 봉합되는데, 종종 나루세의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산의 소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여기서도 하라는 철없는 남편과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데,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건 시부모, 특히 시부의 사랑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경 이야기>의 관계가 변주된 것인데, 결말부에서 하라는 자신의 삶을 찾아, 시댁을 떠나는 결정을 내린다. 시부와 며느리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은 하라가 보여준 최고의 슬픈 연기로 남아 있다. 전통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만, 그 순간에도 겸손, 예의, 품위, 희생 같은 하라의 개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다. 하라의 캐릭터는 이미 신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터다.

하라는 오즈가 죽은 1963년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고는 그레타 가르보처럼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감독과의 남다른 관계 등에서 상상되는 여러 은퇴 이유들이 제기됐지만, 하라는 기자회견에서 “배우란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고, 생계를 위해 일했다”고만 말했다. 그러고는 오즈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도시인 가마쿠라에서의 은둔이 시작됐고, 그 생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가르보도, 그리고 하라도 요절할 수밖에 없는 스타의 운명을 긍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은둔하는 그때, 이미 배우로서의 삶을 모두 소진한 스타의 운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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