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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바디무비] 한번뿐인 존재에게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일러스트레이션) 2015-04-09

마지막회- <위플래쉬>와 죽음, 애도 그리고 슬픔에 대해 곱씹다

*<위플래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삶은 불완전하며, 쉽게 바뀔 수 있으며, 모래 위에 지은 성과 같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운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두번 다시 볼 수 없구나, 두번 다시 만날 수 없구나!’ 그런데 이 말 속에는 모순이 들어 있다.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다’라는 말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두번 다시 볼 수 없다니!’ 이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흘러가는 것들을 아쉬워하면서 손을 흔들지만 우리 역시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는 삶에서 딱 한번밖에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고, 거꾸로 달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여태껏 아무도 되돌아온 자 없는 그곳, 그 미지의 나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는 햄릿의 말이다. 나 역시 죽음으로 떠밀려가는 것이 두렵다. 언젠가 만나게 될 폭포 아래의 거대한 심연이 아찔하다. 웰다잉(well-dying)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끔찍한’ 죽음이든 ‘편안한’ 죽음이든 죽음을 설명하는 단어 위에 방점을 찍을 수는 없다. 방점은 오로지 죽음에만 찍힌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목숨이 유한하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나는 죽음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15살의 내 자아는 세상이 평화롭고 내 행복이 튼튼할 때에도 언젠가 정해진 날에 덮쳐올 철저한 비존재 상태. 나의 철저한 비존재 상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한 사멸을 생각하면 너무나 두려워서 초연하게 맞선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용기’라고 부르는 것은 뭘 모르는 멍청한 소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끝내 바스라져서 철저한 비존재 상태로 변할 것이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며 기억도 남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애도는 곧 사라질 것이며, 애도한 자들 역시 또 다른 사람들의 애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용기로 죽음을 대할 수 없으며 준비로 죽음을 환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조문객들이 찾아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였어요.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만 그건 우리의 삶이 아니다. 삶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우리를 집어삼킨다. ‘나의 삶’이나 ‘너의 삶’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누구도 삶을 소유할 수 없다. 삶을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삶은 우리를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팽개친다. 죽음을 언급하며 삶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종교를 데려온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어린 나이에 여러 죽음을 목격한 ‘한스 카스토르프’는 ‘노련한 전문가와 같은 감정과 표정을 보이며, 특이하고도 조숙한 분위기를’ 띤다. 그는 죽음을 이렇게 느낀다. “죽음에는 경건하고 명상적이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속성, 즉 종교적인 속성이 있지만, 이와 동시에 전혀 다른, 이와는 반대되는 속성, 즉 지극히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속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지도 명상적이지도 경건하지도 않으며 단지 슬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다.” 죽은 자는 더이상 슬프지 않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종교로 슬픔을 무마하려 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인용하며 삶을 가르칠 수는 없다. 인용된 죽음은 언제나 이용될 뿐이다. 영화 <위플래쉬>에서 선생 플레처(J. K. 시먼스)의 최악의 모습은 뒤늦게 밝혀진다. 그는 죽은 제자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고 그를 가르친 일이 행복했는데, 얼마 전 사고로 죽고 말았다’고 설명하는 선생의 표정은 비통했다. 솔직히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사고로 죽은 제자와 그의 마지막 연주와 독재자 같던 선생의 눈물을 섞으니 강렬한 최루탄이 됐다. 나는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진실은 나중에 설명된다. 그의 제자는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고, 플레처 선생의 눈물은 진의가 의심스럽다. 학생들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플레처 선생은 자살한 제자의 죽음을 왜곡한다. 자신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든, 학생들의 감정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든, 어떤 이유에서라도 최악의 왜곡이다. 플레처 선생은 과연 죽은 제자를 단 1초라도 애도한 적이 있었을까. 그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곧바로 자기합리화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는 건 폭력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드러난 행동으로 깊이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나는 플레처 같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미래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그들에게 미래는 경주마에게 씌우는 눈가리개이며,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장치이다. 그들은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고 미래에 투자하면 역사라는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고 사람들을 꼬드긴다. 예술가에게 그건 엄청난 유혹이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역사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역사에 남길 포기하고 현재를 즐길 것인가. 현재의 삶을 포기해도 역사에 남을 확률은 적다. 룰렛 게임의 36분의 1보다 확률이 낮은 게임이다. 대신 역사에 남길 포기하면 누구든 현재를 즐길 수 있다. 예술가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에서 가장 기이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애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그건 너무 정신분석학적이다.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언뜻 책 전체를 부정하는 문장 같지만 실은 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문장인지도 모르겠다. ‘두번 다시 만날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슬픔 속에 있는 것이다. 슬픔 속에 머물 수 있다는 말에 속기 쉽지만 우리는 시간에 떠밀려가는 존재들이라 그럴 수 없다. 우리의 육체는 슬픔에 머물기를, 정지된 시간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낡고 병들고 부서지면서 어딘가로 향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번 회로 바디무비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