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꿨다. 키 크는 꿈이라던데, 꿈속 하늘에서의 비행 경력으로 치면 키가 2m는 넘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만큼 자주 하늘을 날았다. 다른 꿈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하늘을 날았던 장면만큼은 선명하다. 날개 같은 건 없고,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 두팔을 벌리고 계곡 사이, 구름 너머, 들판 위를 휘젓고 다닌다. 비행은 불안하고 방향은 예측 불가능하며 추락과 상승이 수십번 반복된다. 영화 <버드맨>에서 주인공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보고, 내 꿈을 옮겨놓은 줄 알았다. 컴퓨터그래픽은 어설프고 하늘을 나는 자세도 어정쩡해서 내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꾸는 거겠지.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은데, 도무지 새가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거겠지.
<버드맨>은 슈퍼히어로물영화인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스타에 올랐다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의 이야기다. 리건 톰슨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하게 되는데, 영화 <배트맨>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마이클 키튼 덕분에 실제와 영화 속 이야기는 묘하게 겹친다. 배트맨과 버드맨, 무슨 차이일까. 배트맨의 탄생 배경은 <배트맨 비긴즈>에 나온다. 어린 브루스 웨인은 마당에서 놀다가 박쥐굴에 떨어지게 됐고, 수많은 박쥐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는다.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에 박쥐 모습을 볼 때마다 울렁증을 느끼게 됐다는 설정이다. 부모님이 강도에게 피살된 원인 역시 박쥐와 상관이 있다. 이래저래 박쥐와는 악연인 셈이다. 그가 배트맨이 되기로 결심하자 집사가 묻는다. “어째서 박쥐냐?” 브루스 웨인이 대답한다. “내 박쥐 공포증을 악당들도 맛보게 해줘야죠.” 거미에게 물리면 스파이더맨이 되고, 박쥐굴에 들어가면 배트맨이 되고, 슈퍼마켓에 들어갔다가 슈퍼맨이 되고(이건 아니고), 리더십 교육을 받고 ‘캡틴’ 아메리카가 되니까 버드맨 역시 새와 얽힌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나는 <버드맨>을 보면서 <버드맨>의 스토리를 혼자서 상상해보았다.
주인공은 조류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정글에 갔다가 여러 종류의 새를 알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들의 이름을 가르쳐준다. 모든 연구가 평화롭게 끝나는가 싶더니 아버지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악당이 한명 등장한다(할리우드영화에 꼭 있다, 이런 악당). 새들의 초능력을 이용해서 GPS를 능가하는 위치 추적 기능을 개발하려던 악당은 라이벌인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린다. 아버지는 거대한 새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새장에서 겨우 살아남고, 새들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주인공은 새들과 함께 살면서 진정한 초능력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악당들을 소탕한다는 것이 <버드맨>의 줄거리가 아닐까. 물론 착한 여성 조류학자가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면 더 좋고, 치킨맨이나 펭귄맨처럼 ‘새와 흡사하지만 멀리 날 수 없는’ 조력자들도 필요하겠지.
버드맨은 새들에게서 어떤 초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 팀 버케드가 쓴 <새의 감각>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선 ‘매의 눈’을 가질 수 있다. ‘매가 시력이 좋은 이유는 안구 뒤쪽에 있는 시각적 민감점인 눈오목(fovea)이 사람과 달리 두개이기 때문’이다. 상이 맺히는 곳이 눈오목인데, 두개의 눈오목에서 좀더 선명한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새 중에서 가장 시력이 좋은 새는 ‘오스트레일리아쐐기꼬리독수리’라고 한다. 하지만 이 새는 눈이 너무 커서 잘 날 수는 없다. 팀 버튼의 최근작 <빅 아이즈> 같은 형상이랄까. 새에게 이빨이 없는 이유 역시 눈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새는 이빨 대신 튼튼한 근육질 위가 있다. 튼튼한 근육질 위 역시 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초능력일 수 있겠다. 아이언맨이 버드맨에게 묻는다. “자넨 어떤 초능력이 있나?” 버드맨이 대답한다. “응, 난 소화를 잘 시켜.” 흠, 훌륭하군. 변비나 급체 때문에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일은 없겠군 그래.
또 다른 초능력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능력’이다. 메추라기뜸부기는 100데시벨에 이르는 시끄러운 음량으로 15분 만에 사람의 귀를 멀게 할 수 있다. 실제로 <버드맨>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환상 속의 버드맨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대목이다. “헤이, 리건. 이번에는 <버드맨: 피닉스의 부활>을 찍는 거야. 아마 애들이 질질 쌀걸. … 네가 괴성을 지를 땐 수백만명의 고막이 터져버릴 거야.” 버드맨은 새의 능력을 극대화해 사람들의 고막을 찢어버리는 초능력을 얻을 수 있겠다. <쿵푸허슬>의 사자후 아주머니를 떠올리면 되겠다.
메추라기뜸부기가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신의 귀가 멀쩡한 이유도 재미있다. 새들은 자기 목소리를 줄이기 위해 반사작용을 이용한다. 자기가 소리를 내는 동안과 그 뒤로 몇초간 피부 덮개가 바깥귀를 막는다. 어찌보면 이것도 ‘버드맨’ 역할을 한 리건 톰슨을 닮았다. 리건 톰슨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큰 목소리로 말한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초능력’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네, 사장님, 회장님 및 여러 간부님 말씀 중인 거 맞아요) 특이하다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늘을 날 수 있고, 멀리 있는 걸 볼 수 있고, 소화를 잘 시킬 수 있고, 큰 소리로 고막을 터뜨릴 수 있는 정도가 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초능력일 텐데, 뭔가 부족해 보인다. 딱따구리의 부리가 중요한 공격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손바닥을 모아 쥐면 주먹이 되듯, 딱따구리 역시 나무에 구멍을 낼 때 부리를 모아 날카롭고 둔감하게 만든다. 인간의 입을 부리로 바꿀 수 있다면 두개의 주먹, 두개의 다리, 한개의 입으로 공격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인디언들은 엄청나게 강력한 흰부리딱따구리의 부리를 부적으로 쓰기도 했다니까 버드맨의 가슴팍 로고는 흰부리딱따구리의 부리로 하면 좋을 것 같다. 버드맨이라고 나타났는데 트위터 로고 같은 귀여운 문양이 가슴팍에 새겨져 있으면 (영화 속 ‘버드맨’은 별다른 마크가 없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도 무척 실망스러울 테니까.
영화 속 영화 <버드맨>은 3편까지 제작된 모양이다. 4편의 출연 제의를 받은 리건 톰슨은 블록버스터에 진력이 나서 버드맨에서 하차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 중간에는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버드맨은 아이언맨을 이렇게 평가한다. “재능의 반도 못 따라가는 광대가 깡통을 입고 돈을 쓸어모으고 있어.” 버드맨이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만들어진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맞붙는다면, 무척 볼만한 싸움이 될 것 같다. 우선 둘 다 하늘을 날 수 있다. 버드맨의 부리로 아이언맨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버드맨은 아이언맨의 다양한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능글능글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자기 파괴적인 리건 톰슨이 맞짱 한번 떴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