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등에 업은 청년. <스물>의 동우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혈기왕성한 친구들이 클럽을 돌아다니며 운명의 그녀를 찾고 위의 학번 선배에게 반해 관심도 없는 투자 동아리 가입신청서를 작성할 무렵, 가진 게 너무 없어 고달픈 스무살 청년은 오늘 저녁 슈퍼에서 쌀을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밤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마음 가는 여자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오랫동안 모아온 게 틀림없을 피자 쿠폰을 돌돌 말아 무심하게 건네는 것뿐. 취해서 웃고, 실수해서 웃고, 차여도 웃는 <스물>의 해맑은 청춘들 사이에서, 동우는 그들이 미처 가늠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정함을 미리 체감하는 캐릭터다. ‘그곳’의 기원을 탐구하다 우주까지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이 영화의 저돌적인 재기발랄함에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실어주는 인물이기도 하고.
<스물>의 이병헌 감독은 “큰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던” 친구의 일화가 동우라는 인물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적 있다. 하지만 “영화 속 동우보다 훨씬 진지했던” 친구의 모습을 코미디영화인 이 작품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준호씨를 염두에 뒀다. 요즘 20대 배우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 되는’ 얼굴이랄까? 어떻게 보면 멋있는데 또 어떻게 보면 귀엽고, 한편으론 모성애를 자극하는 얼굴이기도 하고. 이 배우가 생활력 강한 캐릭터를 맡았을 때 여러 가지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아이돌 그룹 출신의 배우에게 본격 생활형 연기라니. 그건 이준호가 아닌,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어떤 가수 출신의 신인배우에게라도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 집이 망했는데 왜 니들이…”라며 식판에 놓인 반찬을 무심하게 집어먹는 영화의 초반부 장면부터, <스물>의 이준호는 자신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을 줄 아는 배우다. 치호와 경재를 연기하는 김우빈과 강하늘이 스크린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스무살 남자가 써내려갈 수 있는 ‘지질의 역사’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동우 역의 이준호는 웃음기를 지운, 다소 진지한 자기만의 고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구들과 함께할 때마다 철없는 스무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다른 결의 모습을 보여준다. “왜 그런 거 있잖나. 어른스러운 모습 사이로 약간의 어설픔이 엿보일 때, 그런 모습이 더 귀엽고 애틋한 거. 분장실에 가서 동우로 분장한 준호씨의 모습을 보는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다. (웃음)” 그가 이병헌 감독을 감탄하게 한 바로 그 이유를 <스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무살 무렵의 이준호가 어땠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난 2006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서바이벌>에서 6500여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1위를 했던 그는 JYP엔터테인먼트에 연습생으로 들어갔고 스무살에 아이돌 그룹 2PM의 멤버가 되어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무대 위에 섰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곤 하는 수많은 20대의 초상은 이준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누려보지 못했던 ‘평범함’에 대한 갈망은 <스물>의 동우를 선택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동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보면 경재나 치호에 비해 재미와 웃음 코드가 적은 인물인데,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동우일 거라 생각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한 숙제는 ‘상상’으로 풀었다. 이병헌 감독은 그에게 동우 역을 위한 레퍼런스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고군분투기를 담은 최규석 작가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을 건넸지만, “왠지 만화를 보는 순간 얽매이게 될 것 같아서”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다시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부를 노래는 내가 직접 만들고 싶어”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듯,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건 “감독님의 그림과 내가 그리는 그림을 현장에서 맞춰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물>의 현장에서 이준호가 만들어낸 동우의 키워드는 ‘피곤함’이었다. 학원비와 밥값을 벌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그 와중에 아픈 엄마와 천진난만한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전형적인 생계형 20대 가장의 숙명. 그런 동우를 이해하기 위해 “아무것도 사지 않는” 시간들도 가져보고, 옷도 “최대한 편안하고 후줄근하게” 입으며 준호는 점점 <스물>의 동우가 되어갔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 현장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과 편안함, 그리고 김우빈과 강하늘이라는 ‘동갑내기 친구’를 얻은 건 또 다른 성취다. “<감시자들>과 <협녀: 칼의 기억> 현장에서는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게 배울 거리였다. 현장의 분위기부터 선배님들의 모든 행동이 공부가 된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 현장이 편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이번 현장이 공부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받아가는 게 아니라 좋은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건 <스물> 현장의 좋은 점이었던 것 같다.”
<스물>의 동우와 이준호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느덧 데뷔 7년차 가수가 되었고, 한번쯤은 휴식의 달콤함을 꿈꿔볼 법도 하지만 이준호는 무대와 녹음실과 현장을 부지런히 오가는 삶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건 특유의 완벽주의적인 근성 때문이기도 하고, 뒤처지면 잊히게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푹 쉬어본 적이 없다. 멤버 중에서도 언제나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 나는 쉴 때조차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쉬는 게 좋으면서도 도무지 쉰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는 복합적인 마음이 든다. 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예전에 형들이 얘기하는 걸 안 믿었는데, (시간이) ‘훅 간다’는 말이 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벌써 4월이 다 돼간다! (한숨) 하지만 그만큼 정신없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거기에 만족해야지. (웃음)”
최근 몇년 새 영화 현장을 찾는 일이 잦아지며 이준호는 스무살 무렵에 느꼈던 조바심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과 부족한 실력에 대한 갈증이, 이 스물일곱살 신인배우의 마음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스물> 속 동우의 말처럼, 포기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깨달은 적이 있다. 가수 데뷔를 준비하면서 아무리 봐도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수두룩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 순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 실력이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느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포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이 ‘꽃봉오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꽃은 꽃인데, 아직 피지 못해 움츠러들어 있는. 어떤 꽃이든 언젠가는 피기 마련인데, 어떤 꽃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더 예쁘게 피는 거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의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연기를 시작하는 단계인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바람>의 정우 같은 생활 연기도, 더 나이들기 전에 예쁜 교복을 입는 학생 연기도 해보고 싶다는 이 신인배우는 앞으로 어떤 꽃을 피워낼까. 배우 이준호의 ‘봄’이, 지금 막 시작되고 있다.
Magic hour
엄마를 위한 오리고기
몸이 아픈 엄마는 닭보다 오리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돌아가던 길, 동우는 음식점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오리고기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영화에서는 정말 빨리 스쳐 지나가는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자꾸만 기억에 남더라. 자기 쌀 살 돈도 없는 애가 ‘오리고기 먹고 싶다’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머뭇거리는 장면. 그렇게 힘들게 사간 오리고기였기에 병실에서 그걸 쌍둥이 동생이 먹고 있는 모습에 울화통이 터진 거겠지. 그 장면만큼은 동우도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호가 직접 말하는, <스물>의 ‘매직아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