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평론계에 커다란 주춧돌을 놓은 영화평론가 변인식이 세상을 떴다. 1960년대 당대 유일무이 영화전문지 <영화예술> 추천과 <서울신문> 주최 신춘문예 제1회 영화평론 부문 당선 모두를 거머쥘 정도로 뛰어난 평론가였던 그는 1970년대 들어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 영화계에서 변화를 꿈꾸며 영화감독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이원세 등과 ‘영상시대’ 동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에는 열혈영화청년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등을 배출한 동서영화연구회(전신 동서영화동우회) 회장을 맡아 신구 영화평론가들의 가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안타까운 퇴장을 지켜보며 그와 함께 1960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창립한 회원이었던 시인이자 영화평론가 김종원과 후배 영화평론가 장석용이 각각 소중한 사진과 글을 보내왔다.
2015년 3월14일 오전 8시16분, 기독교도인 제1세대 평론가 변산(邊山) 변인식 선생이 78살로 별세했다. 아산병원에서 발인 예배 뒤 16일 오전 10시경,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시안(時安) 추모공원 납골묘에 상패 하나, 두권의 저서 <영화미의 반란>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와 함께 안치됐다. 고 변인식은 무인년 호랑이띠로 1938년 4월24일 아버지 변태순과 어머니 구복길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른 아침, 그의 장지에는 까치 한 마리가 너른 뜰에 놀고 있었다. 십여명의 가족들이 짧은 기도를 마치고 영구차를 타고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서서, 그와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는데 <문 리버>(Moon River)가 낭만조곡(浪漫弔曲)이 되어 느린 저음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혜화초등 6학년 때 열세살 변인식은 6•25 전쟁을 맞게 된다. 1951년 1•4 후퇴 때 그는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피난, 피난처인 남부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복중학교에 입학, 중3 때 서울로 환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3년 여름. 혜화동 소재 보성고교에는 미군 부대가 진주해 있었고, 사흘에 한번씩 운동장에서 미군 위문용 영화가 한두편씩 상영되었다. 미개봉 외화들을 철조망 밖 산언덕에 걸터앉아 원어로 보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중에 변인식도 끼어 있었다. 이때 그가 본 영화가 <망향>(줄리앙 뒤비비에, 1937), <폭풍의 언덕>(윌리엄 와일러, 1939), <역마차>(존 포드, 1939), <애수>(머빈 르로이, 1940), <카사블랑카>(마이클 커티스, 1942), <황야의 결투>(존 포드, 1946), <황색 리본>(존 포드, 1949) 등이었고, 영화라는 대중 오락매체에 대한 개안을 시작한 시기였다. 감수성이 강했던 청소년 시절, 미지의 나라인 미국과 유럽영화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화가가 꿈이었던 그가 영상세례를 받은 시기는 경복고교 시절, 음악 교사 박판길은 이따금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가는 되지 못했지만 ‘움직이는 그림’인 영화와 연을 맺은 그는 고려대 국문학과 학생으로 1958년 고려대 최초의 영화서클 ‘영상’동인회를 조직하고, 대학신문에 영화평을 썼다. 1964년 대학을 졸업, 영화잡지 <영화예술>에 영화평 <열쇠>(캐럴 리드, 1958)를 기고했다.
<시티 오브 조이> 홍보차 방한한 롤랑 조페 감독과 만난 변인식, 배우 김혜수, 장석용, 롤랑 조페, 김종원(왼쪽부터).
변인식은 1960년 11월10일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창립회원이었다. 창립회원은 이영일(회장), 김종원(총무간사), 노만(기획간사), 김정옥, 최일수, 황운헌, 허창, 이진연, 변인식, 최성규 등 10명이었다. 이 기간에 발표된 평론 ‘영화 평단은 자유항인가-비평의 모랄과 순수성’(1965년 <영화예술> 12월호)은 기성 평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또한 1970년대 말, 그는 영화예술화 운동인 ‘영상시대’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길종 감독은 “변인식은 과묵하고 성실하며 책임감과 끈질긴 집념의 평론가이다. 의젓이 서 있는 불꽃같은 정신의 고귀함 같은 투박한 시대정신, 번뜩이는 비평정신은 분꽃을 피우는 피리소리 같다”라고 했다.
월간 <영화예술>의 편집인 이영일은 1965년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을 쓴 변인식을 영화평론가로 추천완료했다. 이어서 1968년 <서울신문>은 신춘문예 제1회 영화평론 당선작으로 변인식의 ‘한국 문예영화의 허점’을 선정했으며 당대의 스타 평론가가 된 것이다.
변인식의 영화평이 처음으로 기성 영화잡지에 게재된 4×6배판 <영화예술>에 1965년부터 1972년까지 7년 동안 총 37편의 글을 실었다. 한국 최초의 본격 영화이론서 <영화미의 반란>(1972)을 쓴 변인식의 삶은 ‘반란과 수용의 영화언어 찾기’였다. 더불어 ‘한국소형영화동호회’로 출범하여 1970년부터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영상작가협회’를 통해 소형•단편영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75년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 감독 등과 ‘영상시대’를 결성하여 예술성 있는 우리 영화의 탄생을 무던히도 기원해왔다. 이후 1978년 12월8일 영화계의 기성 및 학생 등이 모여 ‘동서영화동우회’를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은 유현목, 부회장은 변인식, 사무국장은 장석용이 맡았다. 독일문화원에서 정기적인 모임과 독일영화를 감상했고, 명칭이 ‘동서영화연구회’로 바뀐 뒤 회장을 변인식이 맡았다. 이 모임에서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정유성 등의 영화평론가를 배출했다.
변인식은 마흔이 넘어 1979년 타워호텔에서 이화여대 국문학과 출신의 교사 이혜경과 결혼하고, 1980년에 아들 승빈, 1983년에 딸 승연을 얻는다. 나는 <영화예술> 복간 후 1990년 ‘뉴 저먼 시네마의 형성과 그 작가들’로 평론가로 등단했고 변 선생과의 인연은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그 또한 1989년부터 <영화예술>에 57편의 영화 관련 글을 썼다. <영화미의 반란>(태극출판사 펴냄)과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공간미디어 펴냄, 1995) 저서 2권, <세계영화배우평전>(예일사 펴냄, 1985) 등 편저서 20권, <映畵 100年史>(독서출판사 펴냄) 등 공저 10권을 저술했다.
변인식은 1991년부터 2년간 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5년 청룡영화제 제2회 정영일 영화상을 수상했다. 대학 강의, 신문과 잡지 기고, 영화제 심사위원, 방송 출연 등 분주히 영화평론가로서 활동하던 그는 2000년 38년간의 신일고교에서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퇴직 후 변인식 15년의 삶은 영광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으로 문화계 전반을 종횡무진하던 그는 한국외국어대 불어과에 다니던 아들 승빈의 교통사고를 겪게 된다. 그리고 꽃피는 봄날, 화려한 영화계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