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여섯살이 된 조카에게 물었다. 원휘는 꿈이 뭐야? 꿈이 뭐긴 꿈은 자다 깨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답에 순식간에 제 엄마인 내 동생을 바라봤다. 원휘야, 큰 이모가 너 커서 어떤 사람 되고 싶은지 묻는 거야. 조카는 배시시 웃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니 무슨 애가 꿈도 없니, 이거 큰 문제 아니니?
그래서 시작된 동생과의 한판 싸움. 제 자식 문제라면 언니인 내 머리털이라도 라이터로 지질 기세여서 결혼도 못하고 자식도 없는 내가 서러워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자다 오줌 마려 깰 때 미적지근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잔상 정도로 꿈을 생각한다는 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 같았다. 되고픈 것도 하고픈 것도 많을 나이 아닌가, 여섯살이라면 그림책에서 나팔 한번 봤다 치면 나팔꽃도 그리고 싶고 나팔수처럼 트럼펫도 불고 싶고 팔랑팔랑 나팔바지도 입고 싶고 아줌마들 대화 끝에 나팔관이라는 생소함을 되묻기도 할 호기심의 나이 아닌가.
그러나 조카는 아직 어리고 그 어림에 부합되지 않은 세발자전거가 아닌 사이클의 페달을 내가 잘난 척하며 밟아댄 거라고 치자. 그렇다면 스무살, 기본 교육을 마치고 보다 깊은 교육의 세계로 입성한 그들은 왜 좀처럼 질문이란 걸 하지 않을까. 내가 몇 군데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하다 능력 부족에 의욕 상실로 가방을 싼 결정적인 계기가 실은 그랬다. 무심보다는 무기력에 가까운 아이들 특유의 눈빛이 나 먹고살 궁리에 머리 터질 판인데 문학이라니, 너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니, 불편한 심기로 나를 쳐다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게 늘어진 달리의 시계 같았다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만큼 글을 쓰려는 아이들 또한 많으니 말이다.
학교는 늘고 아이들은 줄고 그래서 내놓은 여러 대학의 구조조정으로 폐과되거나 통폐합되거나 혹은 취업에 유리할 만한 이름으로 대학의 학과 이름이 바뀌어 온 것이 예삿일이었던 바, 특히 나처럼 밥 벌어먹고 사는 일에 막막함을 전제 조건으로 던져주는 문예창작학과 같은 예술학과들은 꼴찌에서 맴도는 취업률을 성적표로 받아들고 이제나 책상 빼나 저제나 걸상 빼나 눈치 보기에 바빴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지성이라는 작자들 가운데 인문학의 위기가 곧 나라의 망조임을 모르는 이 없을 테고, 인문학의 위기가 곧 대학사회를 넘어 시민사회의 몰락을 자초할 것임 또한 잘 알 텐데 왜 이렇게 되었나. 왜들 기본기를 무시한 채 주먹구구식 그때그때 달라요 정책을 펴고 있나.
중앙대가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을 발표해 오는 2016년 입시부터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생들이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도록 전공제를 개편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선진화라… 선진의 반대말을 가늠해보건대 지금껏 후진 했었다는 저들만의 인정인가. 대체 선진이란 말은 언제 쓸 때 가장 적확할까. 대학은 학문의 깊이를 다지는 곳이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거늘 돈 돈 돈, 아주 지겨워서 죽을 타령이다.
대학 시절 ROTC들 떼로 모여 토익에 토플 공부하는 도서관 옆자리에서 매일같이 죽치고 앉아 한국문학대계 읽었던 나. 가난하지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함으로써 갖게 되는 사람의 희소성이 꽤 쏠쏠한 것임을 다들 모른다 해도 미래의 아이들만은 좀 알아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