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호는 몰라도 ‘<미생>의 하 대리’ 하면 금방 말이 통한다. 사원증을 삐딱하게 셔츠 앞주머니에 꽂고, 신입사원 ‘안영이’(강소라)를 부단히도 괴롭히던 하 대리는 한번 보면 잊기 힘든 ‘미운’ 캐릭터였다. 남 비위맞추느라 돌려서 말할 줄 몰라 학교 다닐 때 후배들에게 미움도 꽤 받았다는 그가, 그 ‘걸걸한’ 입담을 한껏 살려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토요일 낮 12시, 케이블 영화채널 스크린(SCREEN)의 프로그램 <위클리 영화의 발견>의 한 코너인 ‘신작의 발견’에서 전석호는 신작을 씹고 뜯고 즐기고 사족을 더하는, 영화 읽어주는 남자로 역할한다. 전석호의 영화 가이드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를 들어보았다.
-<미생>의 ‘하 대리’로 얼굴이 알려져서 요즘 생활도 좀 달라졌겠다.
=인터뷰가 좀 많아진 걸 빼면 마찬가지다. 하던 대로 매일 대학로로 출퇴근하고 사람 만나고 똑같은 생활이다. 지난 4~5년간 쉬지 않고 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있으면 중압감으로 딴생각을 못하게 되니, 지금은 심적 여유가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작품 대본도 보고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내 시간을 가진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인터스텔라> 만들면서 <그래비티>를 보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보는데,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더라. 좀 다른 경우지만 나는 공연할 때 부러워할 게 뻔해서 다른 사람의 작품은 안 본다. 지금은 대학로에서 맘껏 남의 작품을 보고 있다.
-<미생>으로 얻은 효과가 상당하지 않나. 당장 작품 의뢰도 많을 것 같고.
=덕분에 광고도 찍긴 했다. 하지만 CF 찍고 방송을 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지금 어디까지 온 거지?’를 항상 체크한다. 옛날 방식처럼 들리지만, 연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쨌거나 ’헝그리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넉넉하고 누릴 수 있으면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리마인드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작품할 땐 차를 타고 다니는데 요즘은 많이 걷고 많이 본다. 아침부터 하염없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도 관찰한다. 세상 살아가는 걸 경험하는 게 결국 연기 공부라고 생각한다.
-작품 소식에 앞서 케이블 영화채널 스크린의 <위클리 영화의 발견>의 한 코너인 ‘신작의 발견’ 진행을 맡았다.
=드라마 한편이 잘되면 비슷한 캐릭터를 더 해서 얼굴을 알리고 그러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하면 금방 소모될 것 같아서 일부러 좀 피했다. 이 코너는 <비정상회담>의 에네스 카야가 하차하면서 제안이 들어왔다. 늘 관심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이걸 통해서 영화인이라는 이미지를 더 가져갈 수도 있고, 신작도 많이 볼 수 있고. 너무 감사한 기회더라.
-<버드맨>을 소개하면서 ‘1년을 기다려온 작품’이라고 방송 내내 흥분하고,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을 소개하면서 스스로 사극에 잘 맞는 헤어스타일이라며 자기 PR도 아끼지 않는다. 객관성을 탈피한 사심 방송이다. (웃음)
=원래 정석대로 내레이션만 하는 성격의 코너였는데, 제작진한테 이렇게 가자는 의견을 냈다. 2시간 정도 녹화하고 단 몇분으로 편집이 되긴 하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다. 나야 뭐 워낙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고, 특히 이렇게 작품 가지고 떠드는 걸 좋아한다. 편집이 돼서 다행이다. (김)대명이 형이 “석호는 절대 생방송 라디오 나가면 안 된다”라고 하긴 하더라. (웃음)
-영화 취향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됐는데, 본인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오늘도 프로그램 녹화를 하면서 <채피>를 소개하고 왔는데, 닐 블롬캠프 감독의 전작인 <디스트릭트 9>도 굉장히 좋아한다. 감독으로 보면 우디 앨런의 작품을 좋아한다. 기발하면서도 휴머니티가 묻어 있다. 뉴욕을 중심으로 작업하다가 최근엔 유럽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하는데, 장소가 변하더라도 감독 특유의 색깔이 묻어 있는 것 같다.
-<미생>을 보면서 나름 단정한 회사원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시청자에겐 비주얼 타격도 좀 있다. tvN 토크쇼 <택시>에서는 와이드 팬츠로 충격을 주더니, 이번에 고수하는 긴 머리의 ‘산발’ 스타일도 만만치 않다.
=특별히 스타일을 위해서 한 건 아니다. 평소에는 짧은 스포츠머리나 삭발로 다니는 편이다. 하 대리를 할 때 그렇게 긴 머리는 처음이었다. 작품 끝나고 머리를 밀려고 하는데 이성민 선배가 “사람들이 너를 좀 쓸 수 있게 내추럴하게 놔둬라”라고 조언을 하더라. 어떤 작품이든 다음 작품을 위해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두려고 지금은 그냥 기르고 있다.
-짜여진 대본을 벗어나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데 익숙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극 작업할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연우무대에서 올린 <인디아 블로그>나 <터키블루스> <인사이드 히말라야> 등을 통해 연출과 배우가 함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같이 만들어나가는 데 익숙해졌다. 사랑, 우정 같은 슈퍼오브젝트를 정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쉼없이 서로 나눈다. 그렇게 경험하고 이야기 나눈 것들을 취합해서 대사도 만들고 구성도 하고, 즉흥연기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같이 하는 일종의 공동창작 방식이다. 작품을 하면서 배우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 게 많다.
-드라마와 영화로 진출할 기회가 그전에도 없지 않았을 텐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나이(전석호는 1984년생이다)로는 좀 늦은 편이다.
=대학(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거기서도 거의 공연만 했다. 서른 넘어서도 공연만 했다.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고, 또 시기를 놓친 것도 컸다. 쉽게 이야기하면 ‘안 팔린’ 거고, 기회가 와도 딱 맞지 않아서 하지 못한 작품도 있다. 대학로에서 선배들이 흔히 하는 말이 ‘열심히 공연하면 기회가 온다’는 말이다. 난 그 힘든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사실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미생>이 잘되니 한 선배가 끝나기 전에 얼른 소속사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을 하는 걸 듣고는, 이성민 선배가 “냅둬. 이 녀석은 괴짜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라고 하더라. 작품만큼이나 좋은 사람들과의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마음 맞는 동료를 만나는 데 신중하다.
-앞으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건가.
=차기작으로 설경구 선배와 함께 스릴러영화 <루시드 드림>에 출연할 예정이다. 곧 사극도 들어갈 것 같은데 아직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없다. 공연을 할 때는 내가 내 공연을 보는 건 불가능했는데, 영화는 또 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 이번에 영화 프로그램을 하면서 ‘내가 출연한 영화를 소개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영화하고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하자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앞으로도 쭉 가져갈 나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