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애플의 아이폰에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로 휴대전화기를 바꿨다. 오래전부터 아이폰을 이용해왔던 사람으로서 꽤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다양한 운영체제를 경험함으로써 소설 속 주인공들이 (무슨 PPL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이폰만 쓰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게 소설가로서의 의도였다면- 정작 내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아이폰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입도 무거우셔라- 예전만 못한 아이폰6의 디자인에 강력한 항의를 하고 싶은 건 애플을 아끼는 사람의- 정작 아이폰6는 ‘역대급’으로 잘 팔리고 있다- 앙탈 같은 것이었다. 초기의 혼란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고 이제는 안드로이드에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애플의 운영체제 ‘아이오에스’ (IOS)가 아름다운 가구 이름 같다면, 안드로이드는 부품과 선이 겉으로 드러난 기계 장난감 이름 같다. 어감만으로 따지자면 나는 ‘안드로이드’쪽이 좋다.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은 내가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각인시킨다.
2003년 3월 미국의 신경과학자들은 세계 최초로 뇌 보철 장치(뇌의 일부가 손상되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 자리에 기계 장치를 넣어주는 것)를 개발했다. 반도체 칩으로 해마의 기능을 대체하는 인공 해마를 만든 것이다. 대단한 혁명 같지만 실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대신 휴대전화기에 저장한다. 기억도 일정도 사소한 아이디어도 휴대전화기에 저장한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보다 문자와 SNS를 선호하는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안경, 휴대전화, 보청기, 컴퓨터 등 특별한 기능을 위해 외부장치를 이용하는 사람을 ‘기능적 사이보그’(functional cyborg), 줄여서 ‘파이보그’라고 부르는데 보청기를 쓰는 어르신보다 손가락으로 대화하는 젊은 세대야말로 진정한 파이보그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다른 형태의 동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 인간적으로 그러지는 말자’라고 할 때의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점점 달라질 것 같다. 우리가 이용하는 외부의 기능까지 ‘인간적인 것’에 포함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점점 인간성을 잃고 ‘비인간적인 사물’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휴대전화가 인간적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휴대전화스러워지는 것일까. 컴퓨터가 인공지능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우리가 컴퓨터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요즘 나는 손바닥에다 NFC 기능을 이식하면 버스나 지하철에 탈 때 훨씬 편리할 것 같다는 상상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내 몸을 ‘올 인 원’ 시스템으로 개조하고 싶어 하는 컴퓨터의 본성에 가까운 것일까. 컴퓨터와 나의 차이점을 점점 모르겠다. 얼마 전 호킹 박사는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류의 종말을 점치게 한다. 지금까지의 초기 인공지능 기술은 유용성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가 느려서 기계지능의 발전에 대적할 수 없고 결국은 추월당하게 될 것 같다”고 했는데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장면뿐이다.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현대 컴퓨터 과학의 문을 연 앨런 튜링의 삶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는 인간과 기계에 대한 재미있는 대화가 나온다. 앨런 튜링이 학생이었을 때 암호 작성에 대한 책을 설명하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암호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메시지인데, 누구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 열쇠가 있어야 뜻을 알 수 있지.” 앨런 튜링이 대답한다.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거지? 사람들은 말할 때 절대 뜻을 말하지 않잖아. 듣는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내야 하고. 난 한번도 대화에 성공한 적이 없어.” 친구는 ‘너야말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암호 작성에 대한 책을 튜링에게 건넨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암호 같은’ 모호함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우리가 비인간적이 된다는 것은 모호함을 잃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앨런 튜링의 놀라운 점은 인간을 닮은 완벽한 기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기계를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봤다는 것이다. 앨런 튜링은 영화에서 설명한다. “기계도 인간처럼 생각을 하냐고 물었지만 어리석은 질문이에요. 당연히 아니죠. 기계는 인간과 다르니까요. 단지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까요?” <이미테이션 게임>은 마치 컴퓨터 혹은 사이보그로 태어난 앨런 튜링이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앨런 튜링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지만 영화 속의 튜링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컴퓨터 같다. 썰렁한 농담을 하는 것도 그렇고 중요한 순간마다 이상한 대답을 내놓는 것도 그렇다. 아마 앨런 튜링은 튜링 테스트(컴퓨터의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테스트로, 5분간 온라인 채팅을 한 뒤 심사위원의 30%가 인간인지, AI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합격 판정을 받는, 튜링이 제안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앨런 튜링씨, 삑,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군요.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앨런 튜링을 다루는 방식은 불편한 구석이 많았다. 영화는 앨런 튜링을 신화에 끼워맞춘다. 괴짜 같고 컴퓨터 같았던 그가 인간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역사를 바꾼다. 영화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라는 한줄의 대사이다. 그는 분명 전쟁을 끝내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렇게 한줄 요약으로 업적을 정리하는 순간 중요한 걸 놓칠 수밖에 없다. 신화에다 인간을 끼워맞추는 순간 등잔 밑이 어둡게 된다. 그와 함께한 수많은 동료들은? 그를 가르쳤던 선생들은? 그가 읽고 배웠던 책의 저자들은?
이론우주학자 재나 레빈은 과학자들의 말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논문의 저자가 단 한명이라도 문투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과학에서 이런 식으로 자아를 둘러싼 긴장은 엄청납니다. …(중략)… 아인슈타인이 아니었으면 누군가 해냈을 거고, 괴델이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해냈을 것입니다. 다들 자기가 제일 뛰어나고 싶고 제일 먼저 발견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내가 했다는 건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나의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이런 태도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호하다. 알고 있는 걸 빼고는 전부 모르는 존재들이다. 모르는 걸 명료하게 안다고 말하는 순간, 몇줄의 말로 요약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컴퓨터와 다르지 않게 된다. 우리 인간적으로 그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