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열풍. 얼마 전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캠페인이 SNS를 휩쓸었다. 연이어 서점가에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단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2%, 2주 전 대비 131%가 증가. 이뿐만 아니라 페미니즘과 관련한 세미나와 독서회가 곳곳에서 열리며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잠깐 페니미즘 광풍이 분 이후 페미니즘이 화두가 돼 이번처럼 이렇게 들불처럼 번진 적이 있었던가.
뭐니 뭐니 해도 소년과 중년남성, 두 남자의 선언에 빚진 바가 크다. “페미니스트가 싫다”라며 시리아 이슬람국가(IS)로 떠난 김모군과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라는 김모씨의 칼럼이 이 들불의 부싯돌. 희한한 건 그동안 ‘남성연대’와 ‘일간베스트’(일베)로 상징되는 여성혐오의 공세가 지겹도록 펼쳐졌음에도 좀체 불붙을 기미가 없던 페미니즘 담론이 두 김씨의 선언에 화들짝 불을 댕기게 됐다는 것이다.
기묘하다. 발터 베냐민은 위기의 시대에 진보적 지식인이야말로 대중의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화재경보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진보 정치가 거의 고사 직전인 시대에 극우 담론이 이렇듯 외설적으로 ‘정치’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김씨의 IS 발언은 분명 ‘화재경보’였다.
한국의 여성혐오가 결국 극단에까지 다다랐다는 어떤 위험 경보. 어느새 지구촌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저 참혹한 테러집단인 IS보다 페미니스트를 더 막돼먹은 존재로 표상하는 이 과대망상은 그간 얼마나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가 종양처럼 번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소견서에 가깝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2000년대 초부터 일부가 국가기구에 수렴되고, 여러 지난한 논쟁을 거치면서 이슈를 의제화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잃어버린 사이, 한국 남성들은 김치녀, 보수 여성정치인, 게임 규제 여성가족부를 오락가락하며 상상의 괴물인 ‘페미니즘’을 제멋대로 가공해왔고, 드디어 IS보다 더 무시무시한 마녀집단으로 표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동시장 불안과 좌절된 인정욕망을 여성혐오로 차곡차곡 투사해온 비극의 결과다.
2010년 104위, 2011년 107위, 2012년 108위, 2013년 111위. 세계경제포럼 성평등지수의 한국 순위다. 이렇듯 나날이 성별 격차는 커지고 있는데, 한국 남성들의 머릿속 페미니즘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집단이다. 이렇듯 자아의 자존감을 위해 타자를 왜곡하는 건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이 쉬운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해 허상의 마녀를 가공하는 것, 바로 지금 한국이 앓고 있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이다.
여기에, 처방전은 하나다. 더 많은 페미니즘, 그리고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들으려는 더 많은 귀가 필요하다. 여성혐오자들의 망상과 달리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