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귀염둥이’의 준말 속뜻 ‘귀척 요다 미친’의 준말
주석 귀요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귀염’ 떠는 ‘이’를 연음해서 ‘귀여미’를 만들고, ‘ㅕ’를 그보다 작은 어감을 가진 ‘ㅛ’로 교체해서 최종적으로 ‘귀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귀여운 이’를 줄이면 귀여니(인터넷에 로맨스 소설을 연재하던 그 귀여니가 맞다)가 되니까 귀요미와 귀여니는 동일한 뿌리를 가진 이름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귀요미’를 ‘귀척’(귀여운 척의 준말) + ‘요다’(<스타워즈>에 나오는 못생긴 캐릭터) + ‘미친’의 준말이라고도 부른다. 한마디로 귀여운 척은 다 하지만 실제로는 꼬마 오크처럼 생긴 인물이란 뜻이다. 같은 단어로 귀여운 인물과 못생긴 인물이란 두 가지 용법으로 다 쓴다는 거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언어체계는 서로 구별되는(다른 가치를 지닌) 말들을 공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성립한다. ‘크다/작다’, ‘높다/낮다’와 같이 상반되는 말들을 양극에 놓고, ‘맛/멋’(‘멋’은 정신적으로 맛있다는 뜻이다), ‘노랗다/누렇다’(‘노랗다’는 가볍고 예쁘게 ‘누런’ 색이다)와 같이 서로 비슷한 말들을 지근거리에 배열하면 언어의 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양가적인 뜻을 동시에 품은 말들은 언어의 이런 체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거리가 무너지고, 따라서 그 말들로 가늠할 수 있는 조망점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그 말로 이루어진 특정한 언어체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구멍이 된다. 프로이트의 ‘unheimlich’(이 말에는 ‘낯익은’과 ‘낯선’이란 말이 동시에 들었다. ‘낯익은 섬뜩함’이라 번역된다), 데리다의 ‘hymen’(‘처녀막’이란 뜻이다. 데리다는 처녀막이 파괴됨으로써만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이 그 예다.
귀요미도 이런 용어다. “그녀가 귀엽다”는 것은 그녀가 ‘예쁘고 곱고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속한 속성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게 부여된 속성이다. 따라서 “그녀가 귀엽다”는 말은 “내가 그녀를 귀엽게 바라본다”는 말의 준말이다. 소개팅 나가보면 금방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귀엽다’는 말을 “예쁘지는 않지만 호감이 간다”는 뜻으로도 쓰고, “예쁘지 않다”는 뜻으로도 쓴다. 이때 ‘귀엽다’는 말은 ‘예쁘다’의 부정(‘못생겼다’)이기도 하고, ‘예쁘다’와 ‘못생겼다’의 중간쯤(‘예쁘진 않지만 귀엽다’)에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녀가 귀요미인가? 어떤 귀요미?
용례 <귀요미송>은 한껏 귀염을 떠는 노래지만 실은 안타까운 요청으로 가득한 노래다. “한눈팔지 마. 누가 뭐래도 내 꺼 다른 여자랑 말도 섞지 마 난 니 꺼.” 이 노래의 (뭘 더해도 귀요미가 나오는) 이상한 산수를 그녀의 필사적인 소망이라고 하면 될까? ‘원하다’(want)에는 ‘결핍되어 있다’는 뜻도 있다. 난 귀요미야. 그러니 제발 나만 바라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