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부산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둘러싼 심상치 않은 소문과 예측이 스멀스멀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월23일을 기점으로 한바탕의 소동이 부산지역은 물론 국내외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부산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에게 물러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퇴 권고를 했네 안 했네 공방이 오가다, 사퇴 권고를 하긴 했는데 그 이유가 부산시는 영화제 운영 쇄신을 요구한 것이라지만 사실은 <다이빙벨> 상영에 대한 보복 아니냐는 공방에 이르기까지 첨예했다. 사나흘 만에 겉으로 보기엔 어물쩍 수습한 꼴이지만 사실은 안전핀 뽑은 수류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먼저 그동안 벌어진 상황을 일별한다.
<다이빙벨> 상영으로 인한 보복?
지난해 부산영화제는 <다이빙벨>을 상영하지 말라는 서병수 시장의 직접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상영을 강행했고, 그 여파를 예의 주시하던 터라 ‘이용관 위원장 사퇴 권고’ 소식은 단연 이목이 집중되는 뉴스였다.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부산시의 ‘지도 점검’과 감사원 감사까지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그 폭과 강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후문으로 보아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고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긴 하다.
이용관 위원장은 지난 1월23일 오후 4시30분쯤 부산역 앞 한 호텔 1층 커피숍에서 부산시 정경진 행정부시장과 김광회 문화관광국장을 25분가량 만났다. 김 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나간 이 자리에서 정 부시장과 김 국장은 이용관 위원장에게 부산영화제에 대한 ‘지도 점검 결과가 안 좋으니 새로운 사람이 쇄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을 건넸다. 이에 이용관 위전말원장이 ‘나보고 물러나라는 말이냐’고 묻자 정 부시장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다시 ‘시장님의 뜻이냐’라고 되묻자 역시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 이용관 위원장의 ‘의논을 해서 답을 주겠다. 시한이 언제냐’는 물음에 김 국장은 ‘여유 있게 답을 해도 된다’고 했다는 것이 이용관 위원장이 복기한 이날의 정황이다.
그날 부산의 한 지역방송 저녁 뉴스에 ‘서병수 시장, 이용관 위원장에 사퇴 권고’라는 보도가 나가고 여러 기자들이 확인을 요청하자 부산시에서는 ‘지도 점검 결과가 나빠 쇄신을 요구했을 뿐, 이용관 위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한 것은 아니’라고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다음날, 부산시에서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오후에 슬그머니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부산시는 이 보도자료에서 ‘이용관 현 집행위원장의 거취 문제를 비롯한 인적 쇄신 등 조직 혁신 방안과 영화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갈 비전을 제시할 것을 영화제 집행위원회에 요구했다’며 이용관 위원장 사퇴 권고가 사실임을 시인했다.
부산영화제에서도 부산시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먼저, 부산시 지도 점검과 이용관 위원장 사퇴 권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절차가 통상적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부산시의 지도 점검과 후속 조치에 이르는 과정이 예년과 많이 달라 당혹스럽고 그 배경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도 점검한 결과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을 일은 묻고, 개선할 일은 개선하면 될 일’이지 대뜸 집행위원장에게 사퇴하라고 할 일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서로 동의하고,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하는 과정 없이 부산시가 일방적으로, 그것도 공공연하게 집행위원장의 거취를 언급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대단히 유감이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피력했다.
영화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 12개 영화단체가 대책회의를 열고 바로 성명을 발표했다. 영화단체들은 이용관 위원장의 이번 사퇴 권고가 지난해 <다이빙벨>을 상영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며 ‘이는 단순히 이용관 위원장 한 개인의 거취 문제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해치고 영화제를 검열하려는 숨은 의도’라고 주장했다. 부산시가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종용을 즉각 철회하지 않을 경우 비상기구를 만들어 적극 대처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한편 부산시는 사실상 이용관 위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했다고 시인해놓고도 ‘사퇴 권고는 아니었다’거나 ‘쇄신안을 요구한 것이지 사퇴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등 오락가락했다. 정 부시장은 시청 기자실에 찾아가 ‘사퇴 권고를 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뒤집는 볼썽사나운 구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권고 사실이 알려지고 사나흘간 부산지역 언론은 물론 대다수 언론에서 ‘명백한 <다이빙벨> 상영에 대한 보복’이라는 기사가 쏟아지고, 영화계에서도 거세게 반발하는 비판 여론이 압도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출구전략이었다.
다음날인 1월27일 오후 1시30분 부산시의 요청으로 서병수 시장과 이용관 위원장이 만났다. 이 자리에는 부산영화제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 김광회 국장이 배석했다. 부산시는, 이 자리에서 양쪽은 서로 할 말을 하고 유감도 표하며 극적으로 봉합한 것으로 발표했다. 언론은 일제히 수습, 봉합, 화해, 일단락 등으로 표현하며 무마된 것으로 보도하고 일부는 ‘불씨가 남아 있다’는 정도로 토를 달았다.
하지만 같은 날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따로 낸 보도자료의 행간을 살펴보면 일단락은커녕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을 수 있다. 서병수 시장이 ‘먼저 지난 영화제 때 논란이 된 영화에 대한 소회를 말씀하시고 유감을 표’하고, 이어서 ‘앞으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쇄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서병수 시장은 먼저 ‘지난 영화제 때 논란이 된 영화’에 대해 ‘적나라한 소회’를 숨기지 않았고 ‘강한 유감을 역설’했다고 한다. 사실상 지난 영화제 때 <다이빙벨> 상영이 이용관 위원장에 대한 사퇴 권고의 직접적인 사유임을 공공연히 자인한 셈이다.
또 서병수 시장의 쇄신 주문은 터무니없다. 어떻게 제20회를 맞는 부산영화제의 쇄신 방향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용관 위원장도 ‘시장의 여러 지적과 말씀을 존중하지만 온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고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냈다. 또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무를 되짚어보고, 최근 불거진 논란의 여파를 조속히 수습하고 정비해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냉철하게 직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천명했다.
부산은 어떻게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가 됐나
이렇게 흐지부지 시간이 지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20회 부산영화제가 열릴 것이라 안도할 수 없다는 전망이 유력하다. 끝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병수 시장과 이용관 위원장이 만나 봉합하고 일단락됐다는 기사가 쏟아지던 시각에 영화인들은 도리어 ‘부산국제영화제 독립성 지키기 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번 사태를 초래한 부산시가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부산영화제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엄밀히 따지면 부산시장이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임명권을 가진 것도 아니다. 집행위원장은 조직위원회 ‘총회에서 승인을 받아서’ 위촉하게 되어 있다. 조직위원장으로서 영화제의 독립성을 지키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 앞장서야 할 시장이 편협한 정치적 입장을 앞세워 벌인 소모적인 분란에 대해 오히려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이용관 위원장 사퇴 권고 파문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깔끔하게 없었던 일이 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산시는 예산을 흔들거나 예산 교부에 따르는 행정적 권한을 적극 행사해 영화제를 압박할 것이고, 부산영화제 흔들기 공세는 다양하고 더욱 집요하게 이어질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서병수 시장 근처에 어른거리는, 부산영화제를 무슨 이권이나 권력으로 활용하려는 부산지역 일부 모리배들의 추악한 공세도 경계해야 한다.
부산영화제도 이제 홀로서기와 독립을 위한 진지한 고민과 대안을 궁리해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경구는 이미 박제되고 유명무실해진 환경에서 행정권력에서 멀어질수록 영화제는 활력을 더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부산이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로 지정된 배경은 부산영화제의 명성과 문화적 가치 때문이다.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라는 부산에서, 영화제 때 특정 영화를 상영했다고 시장이 집행위원장에게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한 소동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국제적인 망신이다. 부산시만 모른(척 하거나)다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