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갑의 횡포가 처벌받고 을의 억울함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써놓고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순진하다 못해 한심한 인식이다. 그래도 열받는 현실이 계속 생기는 걸 보면, 세상에 대한 기대는 살아 있다는 증거인가 보다.
나는 휴대폰, SNS,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강의하는 것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최소화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집 전화와 전자메일로 웬만한 사람보다 더 세상에 노출된 신세다. 제일 힘에 부치는 일은 지인들이 내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인데, 내용의 전형성 때문이다.
사연인즉 소위 진보, 유명, 훌륭, 소수자 ‘셀럽’으로 알려진 이들의 ‘갑질’이다. 누구나 알만한 사람들이, 믿겨지지 않는 일을 일삼는다. ‘선한’ 자에게 억압받는 약한 자. ‘좋은 일’을 많이 한 유명 인사로부터 억압, 상처, 피해를 입은 이들이 내게 하소연하거나 실질적 도움을 청한다. 한 사람에 대해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대강 상황이 구성된다. 표절, 횡령, 체불, 성폭력, 연애를 빙자한 감정•경제적 착취, 피해자 협박이 가장 기본적인 레퍼토리다. 나는 고상한 것을 좋아해서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조차 기분이 나쁘다. ‘더러운 이야기들.’ 나도 스트레스만 받을 뿐 들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물론 모든 진보 인사가 이런 것은 아니다. 이런 인간들은 태초부터 있었다. 그러나 MB 정권 혹은 신자유주의 체제 확립 이후 좌/우,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약자 혐오와 권력 지향은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억울함은 사법적 해결도 애매하고 피해자가 분노와 죄의식을 왕래하는 분열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도와달라면서도 외부에는 알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복수도 처벌도 어려운 세상사.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스토리는 비밀로 하고 “그 인간의 본질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꼭 나만큼만 고통을 받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 드라마 <로 앤 오더: 성범죄전담반>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보았다. 총부리 앞에서 발생한 명백한 강간 범죄가 무죄 판결을 받는다. 사생활을 포기하고 용기를 냈던 피해 여성은 경찰에게 울부짖는다. “처벌받게 해준다면서요! 나만 망가지고 저 XX는 풀려났어요.”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던 담당 형사는 말한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 사람이 감옥에 간다고 해도, 치유되는 것은 아니에요. 치유는 남들이 알아줘야 해요. 내가 알아 줄게요.”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사회가 알아주는 것이다. 공감의 원리는 간단하다. 고통은 일종의 물질, 말 그대로 짐이다. 타인의 마음이 내 고통에 닿으면 짐은 줄어든다. 그 마음이 모여 사회성을 이루면 ‘양질’ 전화(轉化)를 거쳐, 물질 자체가 변화한다. 고통이 성장의 자원, 역사가 되는 것이다. 알아주는 것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