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감독 이만희 출연 백일섭 <EBS> 3월10일(일) 밤 10시10분
1975년의 한국영화는 암울한 시기로 기록된다. 유신정권의 폭압적인 통치하에서 대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한국영화는 질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바닥에 가라앉았으며 ‘위기’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불행했던 사건 중 하나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이만희 감독은 대단한 프로근성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었다.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다음날 영화촬영을 위해 콘티 작업을 했던 것은 전설적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삼포가는 길>은 이만희 감독의 유작이다. 그의 최대 걸작으로 칭송받는 <만추>(1966)가 현재 필름상태로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삼포가는 길>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만희 영화의 정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삼포가는 길>은 황석영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달은 고향을 찾아간다는 정씨를 만난다. 그는 십여년 만에 고향 삼포를 찾아간다고 말한다. 산길을 가던 두 사람은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술팔던 여자 하나가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연하게 백화라는 아가씨를 만난 정씨와 영달은 이 여자가 같은 인물임을 눈치챈다. 백화와 영달이 잦은 말다툼을 정겹게 벌이는 광경을 본 정씨는 영달에게 백화가 좋은 여자라고 부추기지만 영달은 못내 그녀를 붙잡기 힘들다. 대신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그녀에게 차표를 사준다.
온전하게 <삼포가는 길>은 풍경의 영화다. 영달과 정씨, 백화는 길 위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설경(雪景)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화면을 채운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하면서 세명의 인물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길을 걷는다. 슬로모션으로 영달 일행의 행동을 느린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건 감정 과잉의 흔적이 배어나지만, 억지스럽기는커녕 심금을 울린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과거란 누추하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헐벗은 기억뿐이다.
영달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다. “내가 한때는 얼마나 여복이 굴러들어오고 돈이 많았는지 말이야….” 그런데 화면엔 예상 외의 광경이 겹쳐진다. 과거의 영달은 길거리 노점상을 하면서 돈 때문에 쫓겨다니던 신세였으며, 여복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다. <삼포가는 길>에 나오는 백화 역시 본명을 숨기고 다닌다. 그녀가 본명을 밝히는 건 이별의 장소에서다. 철저한 위장에 익숙한 삼류인생들이 차표와 계란을 주고받으며 헤어짐을 맞는 후반부는 그들의 하찮은 로맨스에 서정적인 숭고미가 얹혀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삼포가는 길>은 한국적 로드무비의 원형이다. 이후 <고래사냥>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의 떠돌이 영혼들은, 한결같이 이 영화의 자식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근대화 이면에서 소외당한 인생의 여정을 지켜본다. 그들은 돌아갈 고향을 잃었으며 남을 사랑하는 법을 잊었고, 내일에 희망을 갖길 두려워한다. 길 위에서 역설적으로 길을 잃은 군상인 것이다. 이번에 방영하는 <삼포가는 길>의 결말은 우리가 알던 것, 비디오 출시본과는 다르다. 비밀을 살짝 공개하자면 훨씬 절망적인 영화라는 정도만 밝히기로 하자.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