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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말코비치, 말코비치? 말코비치!

서울 바로크 합주단 50주년 공연에 내레이터로 참여한 배우 존 말코비치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먼은 <존 말코비치 되기>가 다른 어떤 유명인사도 아닌 존 말코비치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성(姓)의 발음도 발음이지만 (남녀노소가 오직 ‘말코비치’라는 말로만 대화하는 명장면을 추억해보라), 카우프먼이 꼽은 더 중대한 이유는 이 배우의 중심에 들어앉은 ‘불가지성’(unknowability)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일까? 어떤 기분일까? 말코비치는 고도로 오만한 동시에 공손해 보인다. 악역을 연기하는 그의 분노는 대개 폭발보다 암시를 통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소싯적부터 극단을 결성해 연출까지 나아간 엄숙한 면모의 배우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데에 코털만큼도 개의치 않는다. 연기 리서치를 의미 없게 여긴다는 점도 유명하다. <마음의 고향>에서 시각장애인 역을 맡은 그를 영화사가 특수학교에 보내놨더니 딱 2시간 듣고 땡땡이를 쳤는데 결국 오스카 후보 지명을 받았다. 활동 분야는 영화제작부터 오페라, 디자인을 망라하고 친숙한 언어도 여럿이다. 지난 1월10일 존 말코비치가 입국한 목적도 색다른 퍼포먼스 때문이다. 유네스코를 통해 서울 바로크 합주단 50주년 공연에 참여한 그는 1월14일 현대 작곡가 슈니트케의 피아노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에 맞춰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글을 내레이션하는 ‘협연’에 나섰다. 숱한 ‘잠깐 멈춤’(pause)을 포함한 그의 말은 나른한 클라리넷 독주처럼 들렸다. 물론 나는 결코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에 들어갈 순 없었다.

-당신은 평생 극장에서 연기하고 연출했고 2008년부터는 작은 오페라와 연극을 결합한 <지옥 코미디>(Infernal Comedy), <자코모 변주곡>(Giacomo Variations) 같은 비전통적 작품에도 도전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아노 협주곡과 내레이션의 협연이다. 구상 경위를 들려달라.

=몇해 전 호주에서 필립 글래스의 <위치타 보텍스 수트라>(Wichita Vortex Sutra)에, 그 작품의 제목이 유래한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시를 내가 낭송하는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같은 공연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페스티벌에 올리게 됐는데, 필립이 오지 못한 대신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크세니아 코간이 참여해 필립의 곡과 스페인 작곡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작품을 내 내레이션과 결합해 공연했다(이글레시아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음악 파트너이며 말코비치의 영화 연출 데뷔작 <위층의 댄서> 음악도 맡았다.-편집자). 크세니아 코간과 나는, 서울 바로크 합주단의 50주년 프로그램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레퍼토리를 토론했는데 그녀가 슈니트케의 <피아노와 현을 위한 협주곡>을 선택했고 내가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릴 문학 작품으로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영웅들과 무덤들에 관하여>(On Heroes and Tombs) 중 ‘눈먼 자에 대한 보고서’ 장을 골랐다. ‘눈먼 자에 대한 보고서’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통제하고 있으며 만악의 원흉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광인의 이야기다.

-얼핏 듣기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오른다.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다. 이번 공연은 서사가 중요한 스토리텔링 내레이션이라기보다 시쪽에 가깝다. 나의 음성도 악기처럼 쓰인다. ‘눈먼 자에 대한 보고서’만 해도 200페이지 분량이라 다 읽을 수 없고 소설의 전체 맥락에서 분리됐으므로 어차피 서사로서 말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중의 반응은 두고 봐야겠지만.

-그럼 내레이션을 위해 협주곡을 재편곡하거나 휴지부를 늘렸나.

=오, 아니다! 훌륭한 음악을 다른 무엇에 맞추기 위해 바꾸는 시도는 어리석다. 우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그것이 일으키는 감흥이 이미 존재하는 음악과 어우러지길 바란다.

-내레이션은 스페인어로 하나, 영어로 하나.

=영어로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 소설의 영어판만큼 훌륭할지는 확신이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좋은 번역이 있었다.

-당신의 영화제작사 미스터 머드는 <영웅들과 무덤들에 관하여>의 영화 판권 옵션도 획득한 걸로 아는데 제작 소식은 듣지 못했다. 여전히 권리가 유효한가.

=아니다. 2년 동안 영화화를 추진했는데 수중의 돈을 몽땅 날리고 내 작품의 일부를 잃는 끔찍한 사건을 겪는 와중에 기한을 넘기고 말았다(존 말코비치는 2008년 버나드 매도프가 일으킨 대규모 금융사기사건의 피해자다.-편집자). 그러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력을 내지 못했다.

-세상 누구나 그렇듯 본인의 목소리 듣기를 싫어한다는 당신의 인터뷰를 봤다. 어쩌면 미성보다 단어 하나하나를 발성하는(articulate) 특유한 방식이 존 말코비치의 ‘말’을 특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건 당신은 내게 영어도 무척 우아한 언어구나 인식하게 해준 배우였다. 그런 당신이 보기에 내레이션의 예술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사실 해가 바뀌기 전에 커트 보네거트의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오디오북을 녹음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번 공연도 있고 해서 몇달 미뤘다. 내레이션에 별난 면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평소 내 작업과 다른 형식이라 좋다. 음악과 결합된 내레이션은 복잡하다. 일단 음악을 골라야 하고 피아노나 오케스트라와 협업해야 한다. 클래식 음악인들과 작업하다 깨달은 사실은, 말로 전달하는 언어(spoken language)가 음악과 경쟁하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레이션은 그저 음악의 주변을 미끄러져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치 물이 스스로 수위를 찾아가듯이. 내가 보기에 음악은, 인간 내면의 뭔가를 매우 즉자적으로 건드리며 언어를 훌쩍 뛰어넘는 최고로 강력한 예술형식이다. 이를테면 극도로 세련된 음악조차 우리를 감응시키는 방식은 아주 원시적이다. 구어가 그것과 싸울 방법은 없다. 한편 클래식 음악인들과 일하는 건 즐거운데, 아주 다른 예술 종사자인 데다가 엄격한 훈련을 거쳤다는 점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나? 순수성이나 추상성의 측면에서.

=얼마간은.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직접적이니까. 예컨대 문장이 정서를 불러내려면 제반 요소가 정확해야 한다. 하지만 음악은 동일한 효과를 아주 빠르고도 심플하게 이뤄낼 수 있다.

-목소리가 널리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마다가스카의 펭귄>이 처음으로 당신이 보이스 연기를 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베오울프>에서 퍼포먼스 캡처 연기는 경험한 바 있는데, 양자를 비교한다면.

=상당히 다르다. <베오울프>는 꼭 연극하는 기분이었다. 퍼포먼스 캡처 연기는 연극 리허설이 그렇듯 멈출 필요가 없고 공연 배우들과 한 장소에 모여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카메라가 둘러싸고 동작을 기록하므로 카메라의 방향을 비롯해 보통 영화 작업에서 연기를 제약하는 변수들이 사라진다. 반면 <마다가스카의 펭귄>은 녹음 부스 안에서 여타 캐릭터의 연기와 대사를 숙지하고 있는 리더(reader) 한명만 홀로 상대하는 작업이었다.

-목소리 연기에 기초해 만든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녹음을 수정하는 과정이 있나.

=1년 반쯤 지나서 캐릭터의 생김새, 특정 액션의 전개를 확인하고 여러 차례 수정했다. 그런데 기묘한 점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목소리 연기가 보통의 영화 연기보다 훨씬 육체적(physical)이라는 거다. 목소리 액팅 중인 내 모습이 동화 작업의 기초가 되도록 계속 촬영하기 때문에 뜻밖에도 몸을 많이 쓰는 연기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무대 공포증을 겪은 적이 없다고 들었다. 무대에서 연기할 때가 실제로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집 같다는 점을 언제 어떻게 발견했나? 카메라 앞에서도 긴장한 적이 없나.

=처음부터 죽 그랬다. 물론 연극을 했는데 작품이 엉망일 수도 있고, 내 연기가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부가 과정이다. 카메라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많은 탁월한 촬영감독들과 일했는데 그중에서 카메라 액팅에 대해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은 <위험한 관계> 촬영부였던 마이크 폭스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포커스 풀러였던 카메라맨인데, 어느 날 내게 이러더라. “조니, 프레임 안에 없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거야.”

-카메라에 안 잡히는 연기는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 관객한테든, 누구한테든, 어떤 의미에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연극은 다르다.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프레임 안에 있다. 한쪽이 훨씬 제약이 적고 어떤 의미에선 무한하다. 다른 한쪽(영화)도 무한할 수는… 있겠지만 창작 프로세스가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 연극은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작고한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80년대에 <시카고 선타임스>에 쓴 당신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마음의 고향>(Places in the Heart) 즈음이었던 것 같다. 당신은 말론 브랜도,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와 같은 맥락의 배우로 언급됐다. 이 메소드 배우들과 당신을 구별하는 속성을 지금에 와서 돌아본다면.

=나는 메소드 배우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는 훨씬 덜 지적이고 영감에 좌우된다(mystical). 메소드 연기는 스타니슬라프스키식 메소드의 의붓자식이라고 본다. 거기서 말하는 정서적 환기니 하는 것들을 난 하나도 믿지 않는다. 내가 일곱살 때 기르던 개가 죽어서 겪은 감정은, 러시아 혁명기 농노를 연기하는 일과 극도로 무관하다. 사실 관련짓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단, 두 사실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둘은 전혀 무관하다. 왜냐하면 배우는 오직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순간의 감정만 느낄 수 있으며 느끼는 감정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끝이다. 내 생각엔, 배우가 어떤 감정을 느끼려고 애쓰는 건 쓸데없다. 포인트는 그 감정을 느끼는 일에 자기를 개방하는 거다. 딱 그 감정을 못 느끼면 다른 식으로 느끼면 되고 그것도 괜찮다. 말론 브랜도는 개인적으로 몰랐고 드니로는 인사만 하는 정도라 작업 방식을 알 수 없지만 같이 연기했던 더스틴 호프먼에 대해서는 안다. (사이) 아마도 우리는 뭔가를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입장에선 찾지 못하겠다.

-훌륭한 배우들이 다르면서도 공유하는 바로 그 ‘뭔가’를 너무도 알고 싶지만 거의 포기했다.

=하긴 배우 아닌 사람에게는 비의적(秘儀的)으로 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더스틴 호프먼은 기본적으로 지적이다. 연기에서 머리가 먼저고 매우 똑똑하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이해하고 연기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데에 탁월하다. 반면 나는 지성을 쓰기보다는 직관적이다. 말론 브랜도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작품만으로 짐작하기에는 본능적 배우에 가까워 보인다.

-일군의 배우를 그룹으로 지칭하는 행위는 항상 위험한 것 같다.

=나도 배우들을 꽤 많이 알지만 전부 다르다. 게다가 같은 배우도 누구랑 하느냐에 따라 변화한다. 즉, 나와 함께한 더스틴, 로버트 듀발과 공연한 더스틴, 톰 크루즈와 연기한 더스틴이 모두 다르다. 나 역시 지금까지 나와 비슷한 식으로 일하는 배우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당신은 거듭 <위험한 관계>로 복귀했다. 애니 레녹스의 뮤직비디오에 <위험한 관계> 속 캐릭터 발몽 모습으로 출연했고 2012년에는 크리스토퍼 햄튼의 원작 희곡을 프랑스어판으로 새로 각색해 직접 연출했다.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아직 <위험한 관계>를 제일 좋아하나.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 크리스토퍼 햄튼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고 훌륭하게 구현된 위대한 이야기였다. 우연히도 출연했지만, 내가 <위험한 관계>에 대해 1차적으로 가진 관심은 배우로서가 아니라 연출자로서였다.

-<위험한 관계>를 내 방식으로 꼭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뜻인가.

=그렇다.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지만. (뜻모를 미소) 영화 이후 한동안 연극 <위험한 관계>의 상연이 뜸했고 영어권 리메이크 영화들이 나왔지만 크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베트남판도, 한국판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뭔지 아나? 작품을 만드는 동안의 경험은 결과물과 무관하다. 작업하는 동안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운 작품이, 결과적으로는 그저 그런 영화로 나올 때도 있다.

-그러고보니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과 현장에서 싸웠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스티븐과 나는 서로의 신경을 거스르곤 했지만, 요점은 세트에서 즐거워도 영화는 별로일 수 있다는 거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제작사를 정하기 훨씬 전에 시나리오를 읽고 대단히 좋아했다는 회고담을 TV 토크쇼에서 봤다. 다만, 존 말코비치가 아닌 다른 사람에 관한 영화로 바꾸기 바랐고 직접 연출을 원해서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결국 출연했는데 어떻게 설득됐나.

=찰리 카우프먼의 스크립트를 처음 읽고 당시 캐슬록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려고 했다. 역시 감독으로서 가진 관심이었는데, 말하나마나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제목의 영화를 내 손으로 연출할 생각은 없었다. (웃지도 않고)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찰리는 다른 사람에 관한 영화로 만들기를 거절했다. 그럼 알았다고 행운을 빈다고 했다. 몇년 후 내가 프랑스에서 살던 시기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전화를 해서는 스파이크 존즈라는 아이가 파리로 가는데 만나보겠냐고 했다(스파이크 존즈는 소피아 코폴라의 전남편이다.-편집자). 스파이크 존즈가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출하겠다고 말했고 그냥 진도나 알려달라고 인사했다. 설마 그런 영화에 투자할 사람이 있으랴 싶었다. 그렇지만 당시 그 시나리오는 이미 할리우드에서 일종의 전설이 돼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블랙리스트’(제작되지 못하고 할리우드를 돌아다니는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같은 건가.

=그렇다. 내가 프랑스에서 할리우드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존 말코비치 되기> 왜 안 찍느냐고 묻더라. 결국 캐스팅과 투자가 갖춰졌고 각본은 원래 좋았고 감독도 마음에 들었으니 하게 됐다. 그러나 <어댑테이션>과 <존 말코비치 되기> 중 고르라면 나는 전자가 더 좋다. (웃음)

-<레드2>의 런던 촬영현장을 구경 갔다가 당신이 테이크와 테이크 사이에 스케치북을 꺼내 색연필로 패턴을 그리고 칠하는 모습을 봤다. 바느질, 뜨개질도 하고 정원 가꾸기도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손으로 하는 일이 주는 쾌감이나 만족이 무엇인가.

=바로잡자면, 뜨개질은 안 한다. 바느질은 하지만. 그리고 자수도 한때 약간…. 글쎄, 일단 흥미와 호기심이 있고 원래 옷감과 패션, 드로잉과 디자인을 좋아한다. 또, 영화를 직업으로 삼으려면 달리 할 일이 필요하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웃음)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뭔가 일거리를 가지는 게 좋다.

-지난해 사진작가 산드로 밀러의 모델이 되어 유명 인물들의 역사적인 사진을 같은 분장과 포즈로 찍은 시리즈를 공개했다. 성별과 나이를 무시한 사진들을 보며 다시 확인했지만 당신에게는 묘한 여성성이 있다. 여자로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보다 조금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상관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마릴린 먼로인 척하건 어네스트 헤밍웨이인 척하건 살바도르 달리건 베티 데이비스건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럼 중요한 게 뭐냐고 묻자) 작업을 잘해내는 거다. 내가 무엇을 연기하느냐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고로 내 신경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어떤 남자가 여성을 표현하는 연기를 불편하게 여긴다면 이해한다. 단지 난 그런 타입이 아니다. 산드로와 새로운 시리즈의 사진을 찍었다. 연내에 공개될 것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를 묘사한다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행복은 물론…. (생각에 잠긴다.)

-(시간에 쫓겨) 과대평가된 가치인가?

=오, 그건 아니고, 샤를 드골이,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날 바보로 아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나도 행복이 우리의 자연스런 운명이라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만족(contentment)은 상당히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만족이란, 많은 걸 입증해 보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상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많다고 느껴도 그러기 위해 뭘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제 삶에서 두려운 것이 별로 없나.

=없다. 왜냐하면 소용없으니까. 우리는 실패를 겁낼 수 있다. 오케이. 하지만 나는 이미 무수한 실패를 겪었다. 그래서 뭐? 달라진 게 없다. 죽음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나이 듦을 무서워할 수 있지만 계속 살아간다면 불가피한 일이다. 두려워할 것은 많지만, 두려움은 상황을 어떤 식으로도 나아지게 할 수 없으므로 부질없다. 삶의 긴 시간을, 자아를 표현하고 흥미로운 일에 쓰는 대신 근심과 공포에 잡혀 보내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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